Past

Nothing But the Night

오직 밤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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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을 향한 우정

이 글은 전시 <오직 밤뿐인>* 을 6일간 설치한 것의 기록이다. A와 B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전시장을 방문하여 작품을 설치하였고, C는 그 기간 동안 전시장을 방문하며 그것을 지켜보고 기록하여 매일 저녁 두 작가에게 전달하였다. 전시장은 유리창을 가리는 커튼이 달릴 것과 조명설치 및 난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 외에 어떤 제약도 없었으며, 두 작가 외의 다른 사람들은 전시 설치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 전시의 제목 <오직 밤뿐인 Nothing but the Night>은 존 윌리엄스 (John Edward Williams, 1922 ~ 1994)의 소설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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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 공간의 여기저기, 여러 장을 이어 붙인 투명 데칼코마니 작품이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려온다. 지나가는 사람의 힘에 걸려 떨어지기도 한다. 그럴 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디로 갈지 헤매다가 적당한 곳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여러 조건이 맞는 곳. 천장에 스틸 판이 있어야 하고, 너무 외지지 말아야 하며, 어느 정도의 빛을 받을 수 있는 곳. 너무 길게 바닥까지 흘러내려 버린 작품은 중간 데칼코마니 몇 장을 떼버리기도 한다. 바닥에 닿지 않고 매달려 있어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흐느적거림이 아닌 흔들림. 얇지만 제법 빳빳하다. 멀리서 입으로 후 불어보았는데, 그 바람에도 움직일 정도로 가볍다.
작은 방 오른쪽 구석, 좌우로 움직이는 빛과 넓게 펼쳐진 유리 조각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계단에 앉아 바라보면 더 넓게 퍼진 듯 보이며, 서서 바라보면 더 투명해 보인다. 그것을 따라 유리의 넓고 판판한 면은 빛을 반사하고, 부서진 모서리 면은 그림자를 만들며 빛과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림엽서 크기만 한 정사각의 종이 위에 그려진 유리컵 그림이 움직이는 벽, 중앙에서 상단 좌측으로 조금 빗겨 난 곳에 붙여져 있다. 움직이는 벽은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비스듬히 틀어 흰 면이 통유리 쪽을 향한다. 커튼은 아직 없지만, 오후 5시쯤이 되면 공간이 어둑해진다. 그래도 아직 유리문 쪽은 밝고 그 반대쪽은 어두워 자리마다 빛의 차이가 난다.

Day 2
공간에 설치된 작품의 연결을 살핀다. 전기의 흐름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찾는다. 전선을 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숨 쉴 수 있는, 비어있는 공간을 찾는다. 숨은 공간을 찾는다. 밝혀주어야 할 공간을 찾는다. 기댈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이 모든 공간에 연결할 수 있는 전기를 찾는다. 허락된 공간과 조건을 찾는다. 조명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며 빛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의 차이를 본다. 작품의 형태를 정한다.
작은 초승달. 입구 좌측의 구석, 아래로 둥근 거대한 책장을 마주 보는 자리의 아래쪽 구석에 책장을 흉내 낸 아래로 둥근 반원 빛을 긋는다. 겨우 찾은 자리에서 주변을 살짝 밝히는 얇고 작은 빛.
가로로 늘어선 책장의 흐름을 잠시 멈춰줄 세로선이 자리할 곳을 찾는다. 하나는 앞쪽에 짧은 직선으로, 다른 하나는 뒷면에 길게 끄트머리가 살짝 휘어진 선으로. 흐름을 멈추듯 따라가는, 책장의 선을 따라 그려진 두 개의 세로선 - 빛이 그어진다. 숨 쉬는 선 - 빛.

Day 3
움직이는 말썽쟁이 랜턴. 유령처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유리 조각을 비추는 랜턴은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생명줄(전기선)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도 자꾸만 엉뚱한 곳에 가서 좌우로 구르고 있거나, 구를 듯 말듯 어색하게 움직인다.
입구가 있는 쪽 긴 벽에 작고 투명한 조각들이 하나씩 붙는다. 유리 조각을 본뜬 투명 비닐 조각, 어쩌면 지도의 부분, 어쩌면 길을 안내하는 단서, 암시. 별자리. 그 벽의 왼편, 둥근 책장의 짧은 세로 빛 아래로 유리컵 하나가 떨어질 듯, 당장 유리 조각이 되겠다는 듯, 살짝 바깥으로 튀어나온 채 놓인다. 그리고 그 아래로 비닐 조각의 탁본, A3 사이즈 흰 종이에 뜬 탁본이 컵의 아래 칸 좌측으로 붙는다. 책장 위에 온전한 유리컵과 책장 뒤 우측 작은 공간에 펼쳐진 유리컵 조각, 그리고 긴 벽에 붙은 유리컵 조각을 흉내 낸 비닐 피스들이 과거, 현재, 미래를 두리번거리며 있는 셈.
흑연으로 그린 유리 조각의 그림. 흑연과 유리는 같은 원소를 갖고 있지만, 가열과 가공에 따라 시커메지거나 투명해진다. 흑연을 유리로 가공하는 대신, 흑연으로 유리를 그린 그림은 그 시커멈으로 투명함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빛살을 투과하고 그림자를 품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그림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음에도 그 덩어리감이 여기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가장 크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헤매다가 보이듯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담은 자신의 물량감을 적당하게 덜어낼 수 있는 곳으로. 갸우뚱.
입구의 좌측, 초승달 빛이 있는 벽에는 2호 정도 될듯한 작은 유리 그림이 허리춤보다 낮은 곳에, 맞은편 책장 너머의 벽에는 20호가 조금 안 될듯한 유리 그림이 그보다 더 낮은 곳에, 벽 라인을 따라 갸우뚱, 걸린다.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모양이 같은 비닐 조각과 같은 성질을 지닌 다른 외관의 흑연 그림은 서로서로 밀어내고 당기며 어색하게 왔다리- 갔다리- 움직인다. 저 말썽쟁이 랜턴처럼!

Day 4
채워진 곳과 비워진 곳을 확인한다. 채워짐보다 비워짐을 바라본다. 참견할 수 있는 곳, 제안할 수 있는 곳. 비움의 제안을 바라봄으로 답한다. 하나의 흐름으로 치우쳐지는 것을 꺼린다. 그것을 조정하기 위한 자리를 찾는다. 그 자리에 전선이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한다. 변압기를 적당히 숨길만 한 자리가 있는지도 확인한다. 설치가 허락됨을 확인하고 자리를 정한 후, 형태를 잡는다. 위-아래로 길게 늘어진 흐름을 중지시키기 위한 가로선, 작품은 이곳에서 즉흥으로 만들어진다. 미리 준비해 온 흰색 아크릴 관을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그 안에 LED 조명을 넣은 후 전기를 연결한다. 만들어진 작품은 간단해 보이지만 과정은 길고, 작품은 예민하다. 조금만 연결이 잘못되어도 빛이 들어오지 않고, 원하는 길이와 형태를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자리가 정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므로, 오히려 어렵지 않다. 대신 이 예민한 것들을 만들고 설치하는 데에 시간이 든다.
또 하나의 어두운 공간을 찾았다. 작품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 화장실과 탕비실 앞의 작은 복도형 공간, 어두운 곳에 꽤 짧은 세로 빛이 생긴다. 오늘은 가로 하나, 세로 하나.

Day 5
커튼 설치. 주룩주룩 빛을 가리는 커튼이 생겼다. 빛의 변화 때문에 공간의 색이 바뀐 것에 반응한다. 색이 없는 것 같았던 공간에 미묘한 색의 차이가 생겼다. 작은 사이즈의 흑연 그림이 세 개 더 놓인다. 하나는 진작에 자리를 잡아 화장실 앞, A의 작은 작업을 조명 삼아 벽에 걸렸고, 다른 하나는 A가 유심이 바라보던 높은 벽 코너에 걸렸다. 다른 하나는 여기저기로 한참 자리를 옮겨 다닌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러다 결국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기둥 앞에 걸린다. 그림들이 슬그머니 공간 전체로 두르는 동선을 만든다. 넓게 퍼지는 유리 조각, 넓게 퍼지는 유리를 흉내 낸 비닐 조각, 넓게 퍼지는 유리와 같은 원소를 가진 그림이 제각각의 스케일로 넓게 퍼진다. 이후 즉석에서 한참 “얼어버린 유리 깨진 순간 빛이 불을 지핀다”을 긁어서 그린 뒤, 그것을 탁본으로 뜬다. 탁본은 둥근 책장의 왼쪽 옆면, 원본은 둥근 책장 옆의 기둥에 붙는다. 채워지는 공간에 긴장감이 깃든다.

Day 6
마지막 작품을 설치하려던 공간에 다른 작품이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한다. 이제 멈추고 나머지를 비워둘까 고민하다가 채워진 자리에 호응하는 작은 작품 하나를 추가한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소외된 공간을 빛으로 드러나게 하는 쪽을 택한다. 이제 공간들은 어느 하나 특별히 드러나거나 물러나지 않는다. 작가들의 눈이 모든 구석을 살폈고, 작가들의 손이 모든 자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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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전시를 위해 이야기하거나 설치에 관하여 서로 합의/논의하지 않았다. 대신 구경꾼이자 번역가를 자처한 C의 기록을 받아 읽으며 서로를 상상했고, 현장에 도착해서는 지나간 상대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에 겹쳐 공간 안의 제스쳐를 가늠했다. 책장을 돌려 넓은 전시장과 마주 보게 한 A의 제스쳐에 B는 책장을 이용한 설치로 화답했고, 설치된 작품에 담긴 B의 목소리를 들으며 A는 그다음을 이어 나갔다.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 두 사람은 묘하게 같은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결론은 역시 달랐지만, A의 시선이 스친 곳에 B의 시선이 따라 스쳤으며, B가 유심히 바라보던 자리에 A의 작품이 들어섰다. 누구의 제안으로 설치의 부분들이 결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A도 B도 아닌, 전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들을 움직이게 한 것일지 모를 일이었다. 이 과정은 침묵으로 상대방의 정서와 철학, 작품과 제스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하는 일이었고, 일시적인 우정이었으며, 상태로서의 ‘협업’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작가들은 막연한 ‘앎’에서 ‘모름’으로 다가가며 지긋하고 느린 대화에 귀 기울였다. 이것은 오히려 사물과의 대화였으며, ‘시차’라는 거리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위의 기록들은 어쩌면 작가들의 대화를 방해한 것이었다. 기록은 그들의 시간을 축소했고, 작가들의 움직임을 분절/삭제시켰으며, 구차하고 경솔한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설치 기간 동안 작가들이 기록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다. 나는 지금도 이 모든 현상을 어그러뜨릴지 모를 글을 쓰며 전시를 다듬고 묶는다. 관객들도 부디 이 기록과 글을 무시하고, 어둠 속에서 귀 기울이며, 상태로서 동화되어 공간에 함께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란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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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밤뿐인>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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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밤뿐인> installation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