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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ation point

2023. 2. 11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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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멀고 먼 갤럭시에서…” 펼쳐진 환상과 현실의 경계

15세기는 미술에 관한 한 위대한 세기였다. 신의 세계였던 중세에서 인간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의 시대로 변화하면서, 브루넬레스키에 의한 원근법의 발명, 얀 반 아이크가 발명한 유화 등의 발전 등 미술기법의 혁명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또한 중세 시대의 사물에 대해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닌, 보이는 대로 사물을 재현하게 된 것은 이 시대의 중요한 변화였다. 이는 예술가들이 세계를 접하는 태도의 변화와도 연결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성수기가 지난 뒤 이러한 변혁의 결과물은 독일과 플랑드르 등 다른 유럽의 지역으로 옮겨갔다. 알브레히트 뒤러,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테르 브뢰헬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실적인 표현과 함께 기묘한 환상의 세계를 접목해 또다른 르네상스 회화의 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임현정은 이러한 르네상스의 예술에 대해 주목했다. 런던 유학 시절 내셔널갤러리에서 열린 다 빈치의 대규모 전시를 본 것을 계기로 르네상스 시기의 잉크 드로잉과 화면 뒷면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배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 시절 제작한 <아치웨이에서 발견한 소파>를 비롯해 임현정은 르네상스 회화의 배경과 보스나 브뢰헬의 상상의 세계를 접목한 다수의 작품을 선보였다. 초현실적인 풍경, 기괴하고 유머러스한 메르헨(märchen)적 세계관 등을 드러낸 작업을 통해 작가는 동시대와 접목된 또다른 우화(allegory)를 만들어냈다. 시간을 초월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작가만의 회화적 탐구였다.
에이라운지에서 2월 11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영감의 지점(Inspiration Point)》은 최근의 작업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특히 드로잉으로만 구성했다. 작가의 작업은 캔버스나 종이 위 표면의 색채 바탕작업을 마친 후 그 위에 ‘어떤 형상’을 드로잉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계획적이 아닌 어떤 ‘영감의 지점’에서 발화한 나무 한 그루 혹은 바위 같은 오브제를 통해 점점 구체화되어가는 방식을 따른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드로잉을 통해 작가가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찾아온 도상들의 조합이 이루어진다. 이른바 작업의 ‘날 것’ 버전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은 ‘영감의 지점’을 추적해 보는 자리다.
출품작을 살펴보면, 먼저 전시 제목과 같은 <영감의 지점> 두 점이 눈에 띈다. 한 점은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에 위치한 전망대인 ‘영감의 지점’에 갔던 경험을 통해 제작한 것이다. 미국 유타와 네바다주를 둘러보는 로드 트립을 하면서 접한 초현실적인 붉은 바위 협곡이 펼쳐진 이 곳에서 작가는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처럼 외계 행성 같았고, 예전에 상상으로만 그렸던 드로잉을 떠올리는 비현실적 풍경을 실제 현실에서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작업 노트에서 밝혔다.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상상의 경계 속 세상에서 작가는 다시 한번 보스와 브뢰헬의 작업을 떠올렸다. 또 한 점의 <영감의 지점>은 이러한 작업의 흐름에서 제작한 것으로, 약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의 커다란 컬러 드로잉이다. 자신이 여행한 하와이 등 다양한 지역의 풍경과 작가만의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오브제들을 아울렀다.
브뢰헬이 그랬듯이 작가에게 환경의 변화는 작업의 변화를 가져온다. 흑사병과 스페인의 침략으로 무너진 중부 유럽은 당시 천국과 지옥, 신의 세계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을 현실세계로 인도했다. 그 결과 플랑드르 지역에서 풍속화의 흐름이 등장했다. 브뢰헬은 초기 보스와 비슷한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이후에는 현실의 풍경을 중심으로 작업했다. 풍속화를 선보인 것도 이러한 현실의 풍경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임현정 또한 런던과 한국에서의 작업 이후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작업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상상의 풍경화 속에 현실의 풍경 요소가 좀더 확장되어 개입됨을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감의 지점’에 대한 작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영감의 지점>, <브라이스 포인트>, <래틀스네이크 레이크>, <아티스트가 있는 풍경>, <부유하다>, <겨울 드로잉>, <달걀들>, <토끼가 있는 풍경>, <빅 풋>, <드로잉 하와이> 시리즈 등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은 과거 북구 르네상스 시기의 드로잉과 동시대 풍경, 환상의 세계가 결합되어 등장한다. 펜 앤 잉크 스타일로 그려진 화면은 즉흥적인 직관성의 필선으로 채워져 있지만, 과거에 선보였던 환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올해 ‘검은 토끼’의 해를 맞이해서인지 화면 속을 노닐고 있는 ‘토끼’가 눈에 띈다. 지금까지 선보였던 기괴한 상상의 동물 외에도 다양한 자연 속의 동물들을 통해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함이 엿보인다.
작업노트에서 작가가 직접 밝히기도 했지만 임현정의 작업은 영화 <스타워즈>의 첫 문구 같다. “먼 옛날, 멀고 먼 갤럭시에서…(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라는 과거 속 신화 같은 문구가 나오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최첨단의 ‘우주 전쟁’ 오브제들이 다수 등장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즉 임현정의 작업은 과거의 미술 씬(scene)을 통해 자신만의 동시대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예술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뒤러와 보스, 브뢰헬은 당시 휩쓴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한 세상의 불안을 작품으로 증언했다면, 임현정은 주변의 풍경, 그리고 상상의 세계를 통해 지난 몇 년간 전세계를 뒤덮었던 코로나19로 인해 피폐해진 세상을 향해 위안, 격려의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이유는 과거든 미래든 시간성을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더라도 결국 인간성과 사랑, 권선징악 등 인간의 보편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임현정의 작업 또한 이러한 환상의 세계 속에서 인간과 지금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는 보편성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풍경과 환상의 세계를 통해 기묘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드러낸 작가가 이번 ‘날 것’의 드로잉을 통해, 또다른 영감의 지점을 통과해 어디로 나아갈 지 좀더 지켜보아야 할 듯하다. 그 영감의 시작점을 엿볼 수 있다는 것에 이번 전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류동현 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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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ation point»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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