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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회화

바보들의 회화_인비테이션

<바보들의 회화> 해제문(解題文)
예술가들은 어떻게 작업을 발화하고 발전시키는가, 그 진솔한 목소리

#1
테오에게
테오야. 우리 같은 사람은 아프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아프게 되면 방금 죽은 불쌍한 관리인보다 더 고독해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있고, 집안일을 돌보면서 바보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만 하고 홀로 지내면서 가끔은 바보처럼 살고 싶어 한다. 우리의 육체를 보더라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친구가 필요하다. (1888년 5~6월)

#2
테오에게
상상하기 어려울 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식사와 저녁에 찻집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그런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델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되면 갑자기 나약한 감정이 나를 덮치곤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는 법을 알아내고 싶다. 마네는 그렇게 하는데 성공했다. 쿠르베도 그랬고. 아, 망할 자식들! 나도 그들과 같은 야망이 있다. 졸라, 도데, 공쿠르 형제, 발자크 같은 무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골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낄 때면 그 욕망은 더 강하게 불타오른다. (1885년 12월 28일)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값을 단숨에 갈아치우는 작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다. 현 시대에 가장 인기있는 화가로, 천재로 추앙되는 반 고흐 또한, 살아생전 인생의 고민과, 경제적인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들은 하나의 숙명처럼 그를 휘감고 있었다. 예술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 물감 하나 살 수 없는 빈곤함에 대한 푸념,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동료들로부터 받은 따돌림,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바람맞는 사건과 고민들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피붙이인 동생 테오와 나눈 서신을 통해서 오롯이 드러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예술가의 이면의 모습이자 인간 반 고흐의 맨 얼굴이다.

스마트폰이 하나의 필수품이 되고, 문자, 카카오톡, 전화 등 의사소통의 매체가 다양화된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즉각적인 의사전달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인스턴트적인 소통이 남발하는 지금, 서신이라는 매체를 선택해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섯 살 터울의 작가 이현수, 한성우는 올 해 초부터 연말까지 약 9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편지라고는 하지만, 여기서는 이메일의 형태로 주고받았다). 여기에는 시시콜콜한 자신의 신변잡기적인 개인적인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해서 가족과도 같은 강아지의 죽음, 연애, 작업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주 내밀하게 오고 갔다. 모든 것들을 직접적이고, 단숨에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들은 편지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의 이야기들을 공유했다.
한성우, 이현수가 만든 《바보들의 회화》전은 조금 특별한 전시다. 신작을 제작해서 갤러리 공간에 걸어 전시하는 기존의 ‘그림이 주가 되는’ 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전시는 두 명의 작가가 300일이라는 기간 동안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으며 발전시킨 서신이 주가 되는 전시다.

기획의 시발점은 단순했다. 이현수, 한성우 작가는 ‘작가의 작품이 갤러리 공간에 걸리기 전까지 무수한 생각들과 마음의 부침이 오가며 전시가 만들어지지만, 그 과정이 보여지는 것은 왜 가능하지 못한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이를 전시라는 형식으로 풀어보고자 시도한다. 작가의 생각의 결과물인 작품이 아닌,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생각의 과정들, 그리고 그 과정의 결과물인 작업까지가 이 전시가 지향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두 명의 작가는 2019년 초부터 그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편지를 썼다. 여기에 서로의 사적인 사사로운 이야기들부터 시작해서 진지한 작업에 대한 생각들, 작가란 무엇이고, 작업이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화두를 던지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두 작가가 가슴으로 말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바보들의 회화’라는 전시 제목을 단 것일까? 과거 톰 울프는 『현대미술의 상실』에서 미술작가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했다. 바로 ‘보호의 춤(Boho’s Dance)’이다. “화가는 그의 이웃, 보헤미아 자체의 서클, 동인, 운동, 주의 내에서만 그의 작품을 보이고 다른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그럴 뿐 아니라 윗동네 상류사회에 대해서는 이를 가는 듯이 행동한다.” 작가들은 무엇인가 일반인들과는 다른 아우라를 풍기면서 미술계를 배회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이 쓰여진 이후 약 45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 ‘보호의 춤’은 여전히 지금의 미술계에도 통용이 된다. 이현수와 한성우는 이러한 미술계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좀더 자신들만의 직접적인 소통에 방점을 둔다. 일견 우직한 ‘바보’처럼, 그들은 작업이 아닌 외부의 분위기로 평가가 좌우되는 것이 아닌, 좀더 자신들의 작업에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선언이자 다짐으로 ‘바보’를 전면에 내세운다. 1975년 개봉한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도 맥이 연결된다고 할까(우연하게도 책과 영화가 세상에 나온 것이 1975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음 속의 ‘찌질한’ 이야기를 스스로 꺼내면 이해받기 어렵고, ‘바보같다’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라는 걱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점도 있지만.

“그럼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드로잉 재료들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아무데서나 아무순간이나 그렇게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있는 거지. (…) 우리는 에이~하며 이제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이제 더 이상 지하철에서 혹은 카페에서든 어디서든 드로잉북을 꺼내 무엇인가를 끄적 이는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면 섬뜩한 거지.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거꾸로 소급해 들어가며 생각하다 보면 더 섬뜩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라는 사실에 맞딱 뜨리게 되는데서 오는 거지. 고작 이유라고 있어 봤자 어디서 보고 듣고 곁눈질로 본 작가라는 정체불명의 이름과 그 이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같잖은 이미지 따위를 어렸을 떄 대단하게 봤던 거겠지. 오! 그래 저게 바로 작가의 모습이야. 쿨한데? 뭐 이런 거겠지. 그리고 그 이미지를 재현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겠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속이면서. 작가 코스프레 하지마 따위의 병신 같은 말들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지가 누구보다도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로 말이야” (한성우, 2019.3.01)

“우선 나의 경우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밖에서 그림을 못 그린다기 보다 안 하게 된 거지. 하고 싶음 할 수 있는 정도랄까.(…) 음.. 그 행위가 창피하다기 보다는 그때의 이현수를 지금 돌아보면 창피한 것이 좀 있긴 하지. 그때는 사람들이 그림보다 나를 봐주길 원했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힐끗힐끗 봐주는 시선들, 뒤에서 살찍살짝 들리는 쑥덕거림들을 좀 좋아했어. 외모도 휘황찬란하게 튀게 꾸미고 예술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지.(앗! 나는 권력 지향적 인간인가. ㅠ)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에 대한 고민은 비어있고 보여지는 행위에만 심취해 있었기에 돌이켜보면 창피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렇다.” (이현수, 2019.3.14)

본래 작가라 함은 조형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작가가 만들어내는 서신은 작가의 체취와 예술세계를 드러내는데 오히려 작업보다 더 내밀하다. 자신의 내면으로 난 창문과도 같은 편지를 통해서 이들은 아주 적나라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들의 서신을 통해서 작가라는 존재가 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작업을 시작하는 아이디어를 얻는지, 어떤 매체를 써야 되고, 어떤 형상을 그려야 할지에 대한 흐름들을 추적한다. 작업노트가 작가자신의 독백이라면, 그리고 비평이 작가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일종의 분석과 평가라면, 편지는 주관적인 자기고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현수, 한성우 작가의 서신을 통해서 공개적인 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보다 인간적인 면모와 작업 이면의 비밀스러운(?) 사적인 사건들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찌질한 점에도!). 그리고 이들의 내면을 알게 됨으로써 작업에 대해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쥐게 될 것이다.

과거 미술사 연구 방법론을 보면, 작가의 전기나 연대기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파악하는 데 또 다른 한 축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반 고흐의 편지도 여기에 해당한다. 동시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이러한 작가 개인의 내밀한 생각과 주관성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깊숙한 지점을 추적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고, 여전히 작가와 작품이 등가의 관계에 위치한다는 관점에서, 그 역할이 일정 부분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대에 이현수, 한성우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눈 개인적인 편지를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오히려 꽤 용기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담하다. ‘바보들의 회화’라고 명명한 둘만의 ‘대담’을 ‘대담’하게 세상에 내놓는 것이리라.

이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전시장에서의 작품을 통한 전시, 이들이 주고받은 서간을 묶어 출간하는 단행본이라는 형태로 보여진다. 특히 이들의 머릿속 생각들을 추적할 수 있는 단행본 형태의 편지는 내부적으로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글을 현재 통용되는 국문법에 따라서 교정 교열을 볼 것이냐, 그대로 갈 것이냐 의견이 분분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당시 이들의 생각과 느낌 그대로를 위해 교정 없이 출간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을 읽는 독자들은 혹여 비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 확실히 비문이 섞여 있고, 종종 해독이 불가능한 문장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은 작가들이 느꼈던 그 순간순간들의 감성을 함께 느끼고,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적이고 내밀한 속삭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이른바 ‘백 만년 멀리 떨어져 있는 외계인’과도 같은 작가들이 어떻게 지상으로 내려와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잠깐이나마 엿보게 될 것이다.

글 / 이승민 (에이라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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