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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구상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종종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발적인 변덕에 가까워 보였고 때문에 실행에 옮긴 적은 몇 번 없었다. 일상의 순간들에 그와 같은 그리기의 욕구가 들어도 그냥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에는 정말 몇몇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 같은 욕구에 대해 말해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어떻게 그리겠다는 뚜렷한 계획은 없었다. 조금 편한 자리에서는 ‘일단 뭐래도 그려보려고요’라고 했고, 조금 어려운 자리에서는 ‘다른 그림의 방식들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게 느껴져서요’라고 했다. 둘 다 거짓이 아닌 선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뭐래도 그려보려고요’라는 말은 너무 많은 용기와 용기를 넘어서는 자만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정말 뭐래도 그려보기 위해서는 용기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수많은 하지 말아야 할 목록들과 그 목록들이 저마다 놓은 돌다리를 두드리다 지쳐, 보일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건 그냥 취미생활이다.’ 정도로 마음을 먹었을 때, 무언가를 보고 그리기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가장 가까운 것에서 시작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평소의 방식들과 거리를 두기 위한 몇몇 조건들을 달았다. 한 번에 그릴 수 있는 크기와 방식 그리고 대상을 실제로 바라보며 그릴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 한편 염두에 두었던 인물 작업들은 다음 기회로 밀려났다. 매일 작업실로 모델이 되어줄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 요원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취미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는데 지난 몇 년간 입었던 작업복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몸에 걸치고 있었으니 나와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조건에도 무리 없이 해당하는 것 같았다. 물감이 여기저기 두텁게 묻어 무거워진 채 벽에 걸려있는 늘어진 모습이 무슨 허물을 보는 듯도 했다. 나의 작업실과 작업복은 사람들이 흔히 작가의 작업실에 대해 가지는 환상적 이미지에 완벽히 부응해서 실제로 몇몇은 작업실의 그림보다도 더 유심히 작업실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하지만 나의 눈에 그것들은 그저 조금 건조해 보일 뿐이었다. 일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가 이와 같은 무미건조함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적당한 거리에 이젤을 펴고 앉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다른 캔버스가 반쯤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캔버스를 치울까도 했으나 그것도 그냥 그리기로 했다.
그렇게 새로운 취미생활을 즐기는 동안 나의 눈은 자꾸 작업복에 묻은 물감 자국들에 머물렀다. 참으로 일관적인 관심사를 가졌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고 애써 다른 방식을 찾은 것이 소용없어지는 것 같아 조금 허탈한 웃음도 났다. 그러자 얼마 전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일도 떠올랐다. 홈페이지를 만들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기도 해서 인스타에 작업계정을 하나 만들었는데, 3줄로 나란히 선 지난 그림들을 내려보며 나는 어쩌면 매번 같은 것을 그려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애써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의 시각적인 관심사를 쫓아 물감 자국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것에 시선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점점 나의 상상 혹은 바람이 그림에 투영되는 듯했다. 그림을 그려 나가는 일은 한편으로 상상을 이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내 새로운 취미생활에서는 나의 상상에 의해 재구성되는 세계보다는 보다 더 오래, 눈앞의 대상에 머물고 싶어졌다.
그때, 머릿속을 맴돌다 점차 뚜렷하게 선명해지는 단어가 있었다.
‘꽃’이었다.
처음 내가 꽃에 대해 말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심지어 전시의 제목으로까지 이름 지어 선보였던 것은 재작년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대학원 진학 때와 첫 개인전에서, 꽃과 관련된 개인적 이야기들을 언급했으니 꽃과의 인연은 꽤 오래 전부터라고 말해야 할까? 정작 자기 주변을 관찰하지 않는 게으른 나의 눈을 지적하기 위해 했던, 집 주변에 피고 지는 꽃들에 대한 어머니의 말 때문에 꽃은 일종의 부채감으로, 유심히 보아야 할 무엇으로서 내 무의식 어딘가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우스운 짐작이고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와 왜 또 꽃이어야 하는 걸까?
L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순수함이란 무엇이었느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2년 전, 나의 개인전에서 L은 요즘 ‘순수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의 질문에 L은 조금 당황한 듯 웃었고, 우리는 곧 안부를 물었고, 조만간 보자며 서로의 건강도 빌었다. 통화를 막 끊으려던 때, L이 말했는데

“그런데…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순수함이란…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2020년의 전시에서 나는 꽃을 그리기도 했고 그리지 않기도 했다. 나에게 ‘꽃’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기보다는 텅 비어있는 것, 부재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는 온전한 꽃과 아무것도 아닌 얼룩 사이 어디쯤이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상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미지였고 그리기를 통해 보다 가까워지기를 요구하는, 도착할 수 없는 장소였다.
실제로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어떤 가망 없는 이미지 앞에 매번 서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은 늘 미끄러짐과 실패의 감정을 수반했다. 이 같은 ‘미끄러짐’은 다소 진부한 관념적 수사도 아니고 ‘실패’라는 말에 어떤 과도한 낭만적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 또한 나는 거부한다. 미끄러짐은 그냥 미끄러짐이고 실패는 그냥 실패일 뿐이다. 재현해야 할 구체적 상이 없이, 뚜렷한 목표와 목적의 설정이 불가능한, 이 같은 그리기의 과정과 끝을, 다른 누구보다도 나에게 먼저 어떠한 말로든 납득시키고 싶었으나 이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꽃을 사러 갔다. 작년 이맘때 내 주위에는 지천이 꽃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두 꽃집을 번갈아 오가며 고민했지만 어떤 꽃을 얼마만큼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가게 앞에 놓인 작은 화분에 눈이 갔다. 만발한 꽃보다는 한두 송이 핀 꽃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주인아저씨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석류나무라고 하셨다. 나는 '그럼, 여기에 석류도 열리는 것이냐고' 재차 물었고 아저씨는 나를 힐끗 보시더니 '석류나무에 석류 말고 또 무엇이 열리겠냐고’하셨다. 생각보다 컸던 목소리에 나는 왠지 조금 혼나는 기분이 들었고, 물을 어떻게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는 스스로 검색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몸을 잔뜩 움츠리며 비닐봉지에 힘겹게 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냥 저렇게 들고 가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을 했고 아직 없는 석류에 대해서도 상상해보았다. 한 손으로는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화분의 밑바닥을 받쳐 들다 보니 조금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가게를 나왔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불러 세우더니 이번에는 돌돌 만 신문지를 가져다 주시면서 가져가 물에 담가놓으라고 하셨다. 신문지 틈으로 안개꽃을 닮은 작은 보라색 꽃들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결국 또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다.

“얘는 이름이 뭐예요?”
의미 등을 돌리고 가게로 반쯤 들어가 신 아저씨는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아, 그거 뭐 스타…. 저긴데”

돌아오는 내내 어쩌다 덤으로 딸려온 꽃을 가리켰던 ‘저기’라는 말이 목에서 자꾸 덜그럭거렸다. 저기… 저기…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 그래서 모르게 되어버린 것, 그래서 모르는 채로 알고 있는 것….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가리키는 것이 지시대명사일 수 있다면 그림을 그렇게 불러보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상상에 의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형적으로 가시화시키는 것, 대상에서 발견한 회화적 관심사를 화면에 옮기는 것, 보이는 것과 보고 있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 이것들은 서로 완벽히 같아질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닐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향해 감에 있어서 그것들 서로는 서로를 바라보고 가리킨다.
3월에 있었던 전시 <기다림 바램>은 모리스 블랑쇼의 책 <기다림 망각>에서 그 제목을 가져와 변형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다림’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것은 내가 그림의 ‘상’을 대하는 태도를 빗대서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에게 그림의 ‘상’은 한두 번의 과감한 붓질로 낚아채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붓질을 더하고 빼며, 우연히 만들어진 화면의 암시를 따라가고 그것이 너무 견고해 보여 다시 흐릿하게 하거나 지워내는 과정에서, 그림의 상이 마치 스스로 드러난 것처럼 나타나 보였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이와 같은 과정에의 걸음은 목표를 정하고 거침없이 향하는 것이 아닌 망설이고 확신 없이 그 주변을 맴도는 모양새를 더 닮은 것 같다. 그것은 스스로 보기에 썩 마음에 들지 않고 때론 더없이 답답하기도 한 데 어느 때는 그냥 나를 닮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가리킴의 손과 서성임의 발 사이에는 어떤 친밀한 유사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글 / 한성우, 작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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