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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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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상상 속 세계를 엿보는 ‘만화-경’

1817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브루스터가 고안한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장난감이 있다. 색종이와 거울을 넣은 망원경처럼 생긴 경통에 눈을 대고 빙글빙글 돌리면, 거울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색채무늬를 볼 수 있는 장난감이다. 어렸을 때 한번쯤은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만화경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신기함과 놀라움이 여전히 머리 속 한 켠에 각인되어 있다 이제 나이가 들어 팍팍한 현실과 지루한 일상을 겪는 요즈음, 과거 만화경 속을 보았던 색색의, 환상의 세계를 꿈꾼다. 이제는 잊혀졌지만, 이러한 만화경의 세계는 새로운 환상과 모험의 세계이자 도피와 위안의 세계를 보여주는 통로다. 경통을 움직이는 데 따라 거울에 비추는 수많은 도상은 이 세상의 변화무쌍함과 그 속에서 흥미를 찾는 우리의 바람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상상의 세계를 선보이는 두 명의 작가가 만났다. 박미라와 임현정은 자신만의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일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들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다.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 책 출간 등 국내 미술신(art scene)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미라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조각,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한다. 도시의 싱크홀 뉴스를 접하고 싱크홀을 통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이른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인 상상의 결과를 보여준 <래빗홀>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는 이후 꾸준히 메르헨적인 상상 속 세계를 흑백의 색상으로 캔버스에 구현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이러한 상상 속 세계에서 등장인물이 빠진, 공간이 주가 되는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는 연극적 공간에서 무대와 관객을 가르는 ‘네 번째 벽’인 막을 모티프로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동시에 어긋난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막이라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닫힌 문>은 이러한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캔버스라는 막을 통해 박미라가 구체화한 상상의 세계를 맞닥뜨린다. 화면 가운데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못 같기도 하고, 검은 구멍 같은 <검은 산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심연의 검은 막을 뚫고 도달한 다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이 피어 오른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는 숲 속의 잘린 나무들 주변으로 귀와 촛불이 검은 배경으로 빛을 비춘다. 이러한 도상은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동하는데, 코로나19 시대를 관통하면서 비대면을 통한 소통(혹은 뒷담화)의 부재로 생기는 오해를 귀라는 도상으로, 암울한 시대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희망을 촛불의 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팝업드로잉>은 자신의 회화에 등장했던 다양한 도상들을 작은 조각으로 모아놓았는데, 입체로 보는 박미라의 도상은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재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새로이 선보이는 신작 <드로잉홀>은 투명아크릴판 위에 그려진 드로잉을 겹겹이 쌓아 위에서 바라보면 흡사 만화경 같은 풍경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난지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OCI Young Creatives 2016’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임현정은 2018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약 4년 만에 2인전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사한다. 미국에 있는 동안 작업에 매진하면서 국내의 그룹전을 통해 종종 소개되었지만, 꽤 많은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오랜만이다. 흡사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히에로니무스 보쉬나 페테르 브뢰헐의 상상력과 재기 넘치는 작업으로 주목 받았던 작가는 미국 생활의 경험을 새로운 신작과 접목한다. 먼저 6점과 2점으로 이루어진 <Strangers in a Strange World> 시리즈는 주변인의 시선으로 살던 작가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온 미국 생활을 모티프로 작업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 열린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한 전시는 작가에게 자신의 미국 이주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 이상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작가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풍경을 작가만의 다양한 상상 속 풍경들과 혼재시킨다. 이집트나 중동의 풍경 같은 <Somewhere>, 버킷을 뒤집어쓴 개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Stranded> 등은 기존 작업들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작업들이다. 이후 작업의 변화가 있는데, 계기는 코로나19의 발생이었다. 코로나19의 발생은 작가의 거주지에 락다운을 가져왔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작가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주변이나 여행지 등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고립된 상황의 작업실에서 작업에만 매진한 결과 <Pacifica>, <Grey Whale Cove>은 붓질이나 색상 등에서 밀도가 높아졌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유를 느끼게 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의 고립감을 해소하는 치유가 되었다. 신작 소품 <Study of Book of Hours>는 중세인들이 해야 할 일을 캘린더 형식으로 묘사한 기도서를 모티프로 코로나 시대에 작가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특히 화면 속 꽃들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 이전에 다녀온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형형색색의 꽃들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위로를 건넨다.
두 작가의 작업은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 속에 위치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의식 너머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주력했던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과는 차이가 있다. 데페이즈망이나 오토마티즘을 통한 의식의 비틀기가 아닌, 두 작가의 작업은 현실의 세계를 기반으로 또다른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현실과 상상 속 다채로운 세계가 사실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비틀기와 불일치가 아닌 연결과 화합의 세계다.
이번 전시에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벗어난 세계의 다채로운 풍경과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은 ‘만화경’이 아닌 가운데 대쉬가 들어간 ‘만화-경’이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의 작품을 통해 다채로운 만화경의 ‘만화(萬華)’일 수도, 다양한 스토리가 숨어있는 ‘만화(漫畫)’일 수도, 수많은 세계가 ‘멀티버스(multiverse)’처럼 펼쳐지는 ‘만화(萬畵)’일 수도 있는 풍’경(景)’을 엿볼 수 있다. 두 명의 작가가 선보이는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또다른 상상, 환상, 그리고 공감의 세계로, 그 통로를 통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묵직한 현실의 세계가 있지만, 다채로운 만화경 같은 상상의 세계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박미라와 임현정의 작업은 우리에게 이러한 상상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만화-경’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류동현 에이라운지 객원 큐레이터,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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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경»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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