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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dd Bird
좀 다른 새
2025. 8. 2. - 2025. 8. 23.
어머니-비체로(부터)의 날개짓, 다시 날기 위한
“광주에서 시작하여 세월호, 이주 여성, 퀴어, 장애, 군사주의, 비인간 존재와 같은 한국 사회의 소수자 이슈들을”(『입속의 협업자』, p.15) 퍼포먼스, 협업으로서의 워크숍 등의 형식을 통해 다뤄온 흑표범의 2025년 에이라운지에서의 개인전 《좀 다른 새》는 2022년 처음 출현한 작가의 “좀 다른 새”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대한 딸의 애증을 토대로 들려준다. 회화와 책이 주요 형식이다. 13권 한정판으로 출간한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 9권이 전시장 1층에 비치되어 있고, 관객은 푸른 표지의 이 얇은 책을 읽는 데 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세 편의 시와 에세이로 구성된 책을 열면 프롤로그처럼 배치된 몇 페이지에서, 스물 즈음에 아버지에게 자신의 출생과 이후의 삶을 부정당하는 듯한, 마찬가지로 그 해에 이혼당하는 엄마의 존재도 부정당하는 듯한 말을 듣고 있는 작가가 등장한다. 방금 미대생이 된 스물의 작가는 이후 “추락하는 기분”, “곧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듯한 공포”에 상시로 노출되었다고, 글자 그대로의 가부장 권력에 의한 존재 부정의 여파로 “내 고통”을 말하는 것의 어려움을 건너뛰고 “한국 사회를 가로지르는 아픈 역사와 그 고통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선 개입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46살의 중견 여성 작가는 “생의 처음부터 취약한 자아를 가졌던 내가 이윽고 반복되는 추락을 멈추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며 쓰게 된 자기 기록이자 자기 이미지에 대한 픽션 에세이”(『좀 다른 새』, p.10)를 쓰면서 자기-대면과 자기-통과를 감행한다.
왜 지금이냐고? 왜 26년 이후 그 추락과 부정을 대면하게 되느냐고? 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 날, 그 순간의 모욕과 공포를 글쓰기의 첫 장면으로 배치하고 다시 쓸 수 있었느냐고? 그건 책에서 계속 호명되는 어머니의 1997년 IMF 이후의 실존적 추락과 18살이었던 작가의 그 해의 100일간의 가출을 함께 짜고 엮어서 ‘다른 새’인 작가 자신의 ‘역사들/이야기들’을 배려할 수 있게 되었기에, 2022년의 어머니의 죽음을 딸이자 작가로서 애도할 수 있는 자기-대면과 자기-화해가 지금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하고 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자기-돌봄과 죽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긍정과 애도가 동시에 작동하는, 1997년에 다른 식으로 추락하고 흩어졌던 두 여자의 삶을 글쓰기의 장면으로 소환하고 거기에 걸맞는 언어를 수여하는 수행과 실천의 결과물이다. 아버지에게 “눈빛이 너무 건방져서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종종 심하게 맞았던”(앞의 책, p.33) 작가가 가정 폭력을 피해 광주집에서 도망을 나와 100일간 서울에 머무르며 친구들의 우정, 한겨울 바깥의 냉대와 십대 후반 여자애가 갖고 있던 꿈이 오롯이 기록되고 있고, 어머니에 대한 혐오와 애정이 각인되고, 사업가에서 “홈리스” 수준으로 추락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 시도된다. 현모양처와는 한참이나 멀었던 어머니의 바깥에서의/으로의 추락은 일견 가부장제 미술계가 원하는 여성 작가에서는 한참이나 멀었던 작가의 작가적 사투와 둘이 아니다. 나름 가부장제 상징 권력을 꿰찬 아버지에 의해 부정당한 두 여자의 유대는 오직 글쓰기를 통해 흐릿하게 가시화된다.
“내 몸으로 수행한 많은 타자들은 사실 동질화할 수 없는 영원히 각자의 몸들이었다. 그 몸들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동행하는 연습, 서로의 연약함을 수용하면서 연대하는 모습이 내가 예술로서 고민하고 싶은 것들이다”(앞의 책, p.88)는 고백처럼 작가는 결국 “홈리스”의 범주 안에서 사망한 어머니에 대한 사적인 에세이를 쓰지 않는다. 대신에 어머니-타자의 삶도 나의 자기-쓰기에서 거리를 보유해야 하는, 감히 동일시와 투사의 방식으로 내 어머니로 주관화할 수 없는, 내가 오직 모르는 존재이므로 존중해야 하는 차이로서 엄연하게 공존한다. 그래서 글은 고독과 고립과 가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연민과 공감을 경계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그래서 일종의 박탈당한 자의 ‘우아함’(나는 이 말을 포기할 수가 없다)이나 싱싱함이 범람한다. 작가는 비행 소녀 같고, 18살 다섯 여자 친구들의 우정은 존나 ‘힙’하고, 기억하는 엄마는 이기적이면서 거칠고, 글자 그대로 계속 추락했던 IMF 이후 중산층의 모습처럼 바닥에서, 바닥보다 더 바닥 같은 바깥에서 혼자였다고 적힌다. 울었을까? 담담했을까? 때때로 나타나 궁핍한 작가-딸에게서 돈을 타간 엄마, 작가가 연대한 사회적 소수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작가로서의 연대와 협업의 사이-공백을 독차지한 이 불가능한 타자-엄마의 죽음이 갖고 온 ‘평화’나 슬픔을 이제 작가는 자신의 모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업의 구멍-핵으로 소환한다. 오직 자신의 경험에 대한 것도 아니고 오직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것도 아닌, 그러나 “있는 그대로” 쓰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감정도 보류하는, 다시 말해서 자기-연민에 빼앗길 수 있는 ‘우아함’을 잃지 않은 채 책은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기존의 자신의 작업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의 작업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공표한다.
흑표범의 분신, 얼터 에고인 새, 싸구려 인조 날개 두 개로 충분한 새, 두 다리로 걷는 사람보다 더 느리게 나는, 새를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흑표범의 몸을 입고 사람보다 더 느려진 이 새는 2022년 홍이현숙 작가와의 가파도 협업에서 처음 등장했다. “내가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 같은 존재”였던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두문불출하던 작가는 “열흘 만에 처음 집 밖으로 나갔을 때, 지하철에서 홍이현숙 작가를 만났다.” 같은 여중을 나온, 엄마보다 두 살 어린 홍이작가에게는 엄마의 죽음을 알릴 수 있었고, 서울을 가오리의 바다이자 좀 다른 새의 하늘로 전유하는 퍼포먼스 영상 <비행 공포(fear of flying), 2023>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다. 동네 주민으로서, 엄마를 기억하는 내부자로서, 비인간 공동체의 이념을 공유하는 예술가로서의 협업에서 가오리와 새가 멀리서 시작해서 구기 터널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흑표범은 추운 겨울 자신의 집에서 날개를 달고 나와 길거리를 걷거나 신호등을 건너거나 “가출 청소년 시절 숨어지낼 만한 장소였던” 화장실이나 “터널 갓길 같은 바깥의 장소들”도 들르면서 구기 터널로 걷는다-난다. 어찌나 느린지, 독수리나 포식자에게는 잡아먹기 딱 십상인 그 느린 걸음-제스처로 작가는 언니에게 혹은 어머니에게, 검은 터널로 간다. ‘현실’에서는 만날 기회가 없는 가오리와 새가 상상 속에서, 두 여자 퍼포머의 몸에 깃들어서 살짝 만나 서로에게 길을 터주며 헤어진다. 둘의 차이는 대치로서, 마주침으로서, 끄덕임의 인사로서, 말-없는-슬픔을 위한 의례로서의 예술로서 확보된다. “서식지를 잃고 멸종위기에 놓인 새들과 내 어머니처럼 사회 바깥으로 떠밀려 집 없는 여자들이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는 상상은 선생님과 함께 한 퍼포먼스로 이어졌다.”(앞의 책, p.90)
“불이(不二)는 그 모든 개입의 진상인 셈이다. 이 둘이 ‘주객’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듯하지만 이것 역시 상(相)이며 주와 객이라는 환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채 연기(緣起)에 의해 번득거리는 존재의 단막(單幕)들이다”(김영민, 『그림자 없이 빛을 보다』, p.57)
흑표범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유아론이나 나-중심주의적 고백으로 갇히는 대신에 바깥으로, 더 춥고 서늘한 곳으로 펼쳐진다.
“삶은 타자들과의 쉼 없는 응하기이며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구하는 것이므로 관건은 방이 아니라 오히려 마당인 것이다. 방은 무위(無爲)와 허적(虛寂)의 교실이라면 마당은 유위(有爲)와 상생(相生)의 현장이다.”(김영민, 앞의 책, p.64)
전시장에서 우리는 새들, ‘존나’ 많은 새를 본다. 아니 존나 많은 새가 전시장에 있다. 하나의 회화이면서 함께 연결되는 방식으로 죽은 새들, 곧 죽을 새들이 배치되어 있다. “좀 다른 새”인 작가가 글자 그대로의 새들, 인간을 위한 환경 안에서 새에게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방식으로 죽어갔고 죽어갈 새들을 떼로 몰고 미술관으로 들어간다/온다. 그러므로 이 새들과 어머니의 죽음은 불이(不二)이며, 작가가 상상하는 자신의 죽음과 곧 도래할 이 새들의 죽음도 불이다. 왜 이 새는 이렇게 느리게 걷는가에 대해 객석의 권동현 작가가 계속 과녁을 자처하는 작가의 형식이라고 통역해 주었을 때 심호흡을 했다. 과녁은 이 작가의 퍼포먼스 <정오의 목욕, 2011>에서 작가가 자처한 자리였다. 기꺼이 죽음을 선매하는, 기꺼이 총구의 욕망에 자신을 내놓는, 가해자의 피해자의 자리에 먼저 들어가 있는 형식으로 가해자의 욕망을 불안정화하려는 전략은 2020년대에는 작가의 좀 다른 새의 형상으로도 작동 중인 셈이다. 이 새는 걷는 인간의 날고자 하는 욕망이 투사된 타자가 아니라, 걷는 인간의 임박한 죽음을 교란하려고 작가가 구현한 이상한 타자의 미적 형상이다. 죽은 새와 죽을 새들과 나란히 좀 다른 새로 분장한 작가와 작가가 새의 부리를 선물한 ‘고마운 사람들’, 또는 작가를 따라 작가만의 새-되기에 참여한 친밀한 타자들이 재현적인 이미지로 그려진 회화 연작이 전시장 맨 안쪽을 차지한다. 어머니와 찍은 사진들과 어린 자신을 찍은 사진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도 있다. 뭐 단연코 매력적인 회화는 5쪽으로 ‘찢어진’ 채 연결된 작가의 자화상 <좀 다른 새>일 것이다. 사람의 두 발 대신에 움켜쥐면 어떤 것도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새의 두 발, 무릎 부위가 찢어진 늘 입는 청바지, 자신의 여성임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정이자 회화적 구성인 두 짝의 가슴, 입술에 힘을 준 얼굴이 읽히지만, 그렇다고 ‘회화’의 형식에 안착하려고는 하지 않는 5쪽의 그림이다.
흑표범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자신이게 되었는 지를 책에 썼다. 이런 작업을 하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 둘은 둘이 아니라고, 내가 나였기에 나를 포함한 우리인 거라고 당신과 나는 여성으로서, “집” 없는 여자들로서 다르지 않다고. 좀 다른 새로서 다른-새-되기에 우리를 초대하는 작가의 자기-고백이자 자기-창안이다.
★ 참고한 것
흑표범 『입속의 협업자, 흑표범 2004~2023』(토탈뮤지엄프레스, 2024)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흑표범 개인전 《좀 다른 새》, 에이라운지, 2025)
김영민 『그림자 없이 빛을 보다 – ‘모른 체하기’와 개입의 존재론 』, 글항아리, 2023.
글/ 양효실(비평)
죽은 새들이 잠든 방에서, 아직 날갯짓을 연습하기
푸드득 푸드득 푸드득
추락하는 동안에도 비행은 여전히 즐거 움이었다.
너는 웃고 있었다.
둥근 어깨에 늘 낡은 에코백을 메고
흰색 페인트가 점점이 얼룩을 그린 팔을 흔들며
다시 날아오를 내일을 너는 반드시 믿었다.1₁
“죽은 것들 곁에서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이 질문을 함께 탐색하기 위해, 내 기억 일부를 여기에 미술로 꺼낸다.
시작은 내게 중요한 한 여자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 결국 폐기되어버린 한 생애를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이라던가 ‘국가 부도’, ‘홈리스’ 같은 몇몇 사회문화적 용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근접할 수 있는 시도는 차라리 나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그건 구조하지 못한 타인을 두고 살아남은 자의 슬픈 변명이자, 나의 처지에서 품었던 전복의 욕망과 예술적 실천을 들여다봄으로써 그와 내가 각자의 삶의 주체이자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고 말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2024년 초여름부터 2025년 봄까지, 『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언젠가 배가 오면 쓰려고 준비해 둔 부둣가의 어망들처럼, 아무도 그것이 거기에 있는 줄 몰랐지만 막상 끄트머리를 잡아당기자 술술 풀려나왔다. (우리는 모두, 창자 안에 이야기가 쌓여 있다.)
이 책은 오토 픽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의 모양이 실제 내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이 타래들이 당신 안의 어떤 매듭과 연결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누군가의 기억을 통로삼아 단 삼 주간 펼쳐지는 이 가상의 시공간이 당신에게 진짜 말을 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구체적인 기억이 당신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만이 중요하다. 어둠 속에서 귓가를 간질이는 타인의 입김, 몸과 몸이 닿으며 피어나는 온기 그리고 기억과 감정의 부스러기가 전하는 지금 여기,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으라’는 명령.
ʻ역시 힙합을 해야 해.’
온몸이 불에 타는듯한 분노가 일었다.
대걸레로 더러운 화장실 바닥을 사정없이 문대면서 사장 새끼 욕을 했다.
이 부조리를 랩으로 고발할 수 없는 나의 미천한 음악성이 진심으로 한심했다.
난 더는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당구장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다.2
위키피디아는 ‘힙합’을 ‘튀는, 생기 있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약동’이라고 설명한다. 예술의 정의는 무한하지만, 나는 십 대 시절부터, 기성에 대한 불복종과 그저 나답게 존재하려는 욕망의 발로로 예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살아오며 만났던 나 같은 사람들과 예술 작업을 하거나, 그들이 하는 예술을 도왔다.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하는 과정은 어린 시절 스카이4와 하던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분명히 거기에서부터 이어졌다. 그건 타인과 친구가 되는 일이었고, 나 자신과 친밀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두 손의 움직임으로 나의 새를 만듭니다.
두 손의 움직임으로 나의 새를 만듭니다.
새는 나 자신이기도 하고, 다른 존재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닌 것을 내 몸에 불러오세요.
나의 바깥과 친구가 되세요.3
환대 받지 못한 작은 생명을 몸으로 수행하는 작업, ‘(죽은) 새━되기’는 자본주의가 자행하는 생명에 대한 권력적 폐기에 저항하는 애도 행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새는 오히려 호스트가 되어 당신을 이끈다. 그리고 낯선 공동체로 당신을 초대한다.
새와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마음이 닿은 문장을,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말해달라고.
1 『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 중에서 시 <추락>, 흑표범, 2025
2 『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 흑표범, 2025, p.70
3 『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 흑표범, 2025, p.125
4 『 좀 다른 새: 정하연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아가 확고한 십 대 소녀. 정하연과 함께 교복을 벗고 밤거리를 놀러 다니며 자기들만의 안전지대를 구축한다.
글 / 흑표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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