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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urrusSusurrus7.31–8.29, 2026
선정적인 회화
―황선영 《Susurrus》
황선영의 회화는 선정적이다. 선정성이란 무엇인가. ‘부채질할 선(煽)’에 ‘감정 정(情)’. 어떤 감정을 강렬하게 초래한다는 것. 작가의 작업에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나/타인의 감정으로 입장하고, 그 감정의 지평으로 타인/나를 초대할 수 있다. 딱 이 화면에서만, 바로 이 화면만큼만 나는 비로소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감정의 층위에서 우리는 철저히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다. 슬픔이 피부를 기어다닐 때 느끼는 서걱거리는 질감과, 불안이 발을 옭아매는 질척한 무게, 기쁨이 두 눈으로 번져 물들이는 빛깔…. 그중 무엇도 타인에게 온전히 가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것과 ‘긍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서로를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는 서늘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끝까지 서로에게 타자로 남기로 했는가. 아니다. 이 물음에 선뜻 대답을 내놓는 목소리야 많겠지만, 가장 오랫동안, 마지막까지 대답하는 것은 예술의 몫일 테다. 말이 멈춘 자리에서 이야기가, 이야기가 멈춘 자리에서 멜로디가, 그리고 멜로디마저 멈춘 자리에서 색과 형상이 대답을 넘겨받는…, 예술엔 그렇게 이어져 온 발악들이 있다. 특히 고통에 대해서 예술은 더욱 절박하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누군가의 고통을 타인에게로 ‘전달’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예술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편이 낫다고까지 했으니까(『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1997), 402쪽). 이 소명은 황선영의 회화를 동여매는 거의 유일한 정의처럼 보인다. 수서러스(susurrus). 나뭇잎이 바람에 스쳐 속삭이듯 바스락거리는 소리. 부채질은 가지를 건너 끝내 나와 타인 사이에 바람이 통하는 길을 발견해 낸다.
물론 선정성은 부정적인 말이다. 대개 성과 폭력이 결부될 때 선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 된다. 그러나 불온한 것은 소재 자체에 있지 않다. 소재가 부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촉발된 감정이 오직 ‘나’라는 개인의 얄팍한 충동 안에서만 맴돌다 증발하는, 자신의 맹목적인 만족에만 복무하는 닫힌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선영에 대해서라면 달리 말할 수 있다. 그의 부채질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바람은 제 안에서 잦아들지 않고 끝내 타인의 심연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그 바람은 어떤 얼굴로 실려 오는가. 황선영의 화면에는 붙들 수 있는 형상이 없다. 희석된 물감이 반투명한 막으로 겹치고, 그 막 사이로 색이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어떤 선은 화면 밖으로 뻗어 나가려다 멈추고 되돌아온다. 무엇 하나 또렷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슬픔인지 불안인지, 또 기쁨인지 이름 붙기 직전의 상태로 화면은 흐른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외려 정확함을 위한 선택이다. 또렷한 형상은 대상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합리적 인식의 편에 있지만, 감정은 그 규정을 끝내 벗어나는 비합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첨예한 감정일 고통으로 초점을 좁힌다면, 아도르노의 말은 도움이 된다. “합리적 인식은 타인의 고통을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내지만, 고통을 체험으로서 나타낼 수는 없다.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같은 책, 39쪽) 감정을 또렷한 형상으로 붙드는 순간, 정작 그것을 겪는 몸은 감각을 잃는다. 슬픔을 슬픔으로 그려 보이는 그림은, 슬픔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그 서걱거림을 놓친다.
작가는 명확하게 재현된 대상 대신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남겨진 존재들, 잊혀진 이들이나 투명 인간, 유령처럼 비가시적인 영역에 남겨진 내면과 목소리”(작가노트)에 시선을 둔다. 그리고 이 희미하고 부서진 세계는 애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것이기에, 합리적인 언어나 구상의 문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다. 황선영 회화가 ‘나’의 내면에서 멈추지 않고 타인의 심연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힘은, 역설적으로 이 철저한 ‘규정되지 않음’에서 기인한다. ‘나도 모를 감정’은 인식과 표현의 실패처럼 들리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감정의 ‘현존’에 가장 충실하다.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은 누구의 것도 아닌 채로 열려있고 그렇기에 당신(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닫힌 서사나 뚜렷한 형상은 타인의 고통을 이미 완결된 것으로 못 박아 내가 들어설 틈을 주지 않지만, 겹겹이 쌓이고 무너져 내리는, 불투명한 색의 지층은 감상자의 내면이 틈입할 수 있는 빈자리를 열어젖히는 까닭이다. 형상 없이 캔버스를 맴도는 타인의 감정 나아가 타자의 고통은,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뭉툭하고 이름 모를 감각과 뒤섞이며 공명한다. 이성적 언어로 재단되기 이전의 헐벗은 붓의 떨림으로 마주할 때야, 비로소 부채질은 고립을 벗어나 타자에게로 건너가는 길을 연다. 이 연약하고도 치열한 추상의 궤적에서, 우리는 유령처럼 잊혀진 타자의 흔적 위에 기꺼이 포개어 누우며 기적처럼 서로에게 스며든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한마디 소개도 곁들인 적 없는 작품을 두고, 관객들은 옛일을, 지난 상실을 이야기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 회화 앞에서 우리가 이해하게 되는 것은 끝내 작가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우회를 통해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곁에 선다.
마음의 결과 겹을 획으로, 레이어로 ‘셈’해 포착하려 하지만, 필치는 끝내 여러 겹의 얕은 붓질로 갈라지며 이 셈을 놓아 버린다. 하나, 둘 헤아려 나아가던 궤적이 헤아릴 수 없는 타래로 풀어지는 자리에, 너의 감정을 알아내겠다는 충동은 그저 함께 있겠다는 동행으로 뉘어진다(〈Counting Currents〉). 애써 덮으려 한 것이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자리에는 미처 매장하지 못한 색이 남아 그 아래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를 고백한다. 외면하지 않겠다. 맥박처럼 진동하는 색은 규정할 수 없기에 가장 또렷하게 살아있다(〈Watermelon Snow〉). 고정된 경계를 녹여내며 은밀히 스며드는 교차는, 얼어붙은 심연에서도 끝내 서로에게 닿으려는 집요한 생기다.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서, 충돌하며 섞이는 색의 온도는 타인에게 맹렬히 가닿으려는 감정의 통로다(〈Ice Algae〉). 안과 밖을 가르는 프레임은 이내 덮이거나 흐릿해지며 서로에게 스민다. 나누는 붓질이 곧 잇는 붓질이 되는 자리. 선을 그으려던 나는 선을 넘어가는 주체로 바뀐다(〈Urchin Lava〉). 캔버스로 무수한 파편이 부서지고 겹치며 일으키는 미세한 마찰은, 마침내 피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없는 속삭임이 된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 제 존재를 드러내듯, 얇고 유연한 붓질이 빚어낸 치열하고도 연약한 떨림은 끝내 시선이 닿지 않던 자리에 남겨진 존재를 화면으로 불러낸다(〈Susurrus〉). 어느 붓질도 이것이 무슨 감정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다. 다만 쌓이고 지워지고 비쳐 오는 결과 겹의 운동으로, 이름 없는 어떤 마음을 저마다의 기억으로 불러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닿았는가. 아니다. 우리는 끝내 같아지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나는 화면이라는 지평에서 잠깐 만나고, 그보다 오랫동안 헤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자. 감정의 층위에서 우리는 철저히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다. 이를 ‘긍정’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황선영의 회화는 또 다른 이유로 선정적이다. 끝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 다음에도, 기어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동을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정성은 위안이기도 하다. 이 서늘한 진실이 새롭지 않을지라도, 예술은 여태껏 제 언어를 넓히며 타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황선영 역시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예술’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를, 그리고 예술에서 ‘이해’라는 낱말이 아직도 중요한 이유를 증명해 낸다. 수서러스(susurrus). 나뭇잎이 바람에 스쳐 속삭이듯 작은 소리를 들으려는 ‘우리’들이 이렇게나 남아있다. 그 순간 인간은 잠깐 가여워졌다가 오랫동안 사랑스러워진다.
/ 조재연 (미술비평가, 아트인컬처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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