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Depth of Trace

흔적의 깊이

[강동주, 문이삭, 한성우]_가로형 3

흔적의 깊이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선 자리는 위치 기반 시스템에 의거해 점으로 찍히고, 위치의 시작과 끝은 선으로 이어지며, 쇼츠와 같은 콘텐츠는 타인의 시공과 서사에 빠르게 접속, 철회를 반복하게 한다. 데이터화된 정보는 공간과 신체를 구성하며, 장소는 기호로 치환된다. 압축, 기호화되는 과정에서 장소는 비장소화되고, 서사는 소멸한다. 그렇게 오늘은 무엇에 귀 기울일 시간을 쥐여 주기도 전에 새로운 것으로 업데이트된다. 주지하다시피 하루를 가득 채운 일상이란 그저 습관처럼 매일 반복되는 시간, 별다른 자각 없는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의 경험이 낯설어지는 순간, 그 사건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 소화하고 통합하는 것이 일상이 갖는 중요한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건을 통해 새로워지는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중첩되는 것,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새롭게 연결되어 구성되는 시공으로서 말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에서 발췌한 글로 이 지면을 시작했듯, 물리적 사물에 새겨진 흔적, 그 존재의 양식들은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에 봉인된 서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 적절하다. 삶을 구조화하는 체계는 도시와 같은 거시적 시스템으로 형성되지만, 삶을 생동하는 시간은 도처에 깔린 흔적에서 감지된다. 벽에 희미하게 남은 얼룩, 바닥에 스친 자국, 한때 누군가 머물렀음을 암시하는 흔한 물건들의 배치 등, 이러한 흔적들은 이미 사라진 시간의 증거이자 현재에 남은 역설적인 현존이다. 흔적은 부재의 현시(presence)로, 감지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사건화하는 방식으로 지금-여기의 자리에 각인 된다. 따라서 일상의 흔적, 그 누적된 시간을 해제하는 일은 그 배후에 놓인 시간의 층위를 읽어내고, 장소에 축적된 기억과 의미를 감각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표면 위에 얇고 검게 자리 잡은 강동주의 드로잉은 공간에 기입된 시간과 사건성에 다가선다. 종이와 흑연의 밀도 높은 마찰에 기인하는 그의 드로잉은 일상의 사적 경험과 신체로부터 확장된 시간을 추상화한다. 그는 대상을 관찰하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대상의 표피적 형상이 아닌, 자신과 대상이 맺는 '관계'의 순간에 귀 기울인다. 작가 고유의 경험, 그 사적 시간과 행위를 경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다각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얇은 이미지는 내밀하면서도 깊은 시간의 층위를 보유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의 유년기의 기억과 경험에 링크된 장소에 기반한 <드로잉>(2015) 연작에서 그는 세 번의 다른 경로로 도시를 유영하며, 낮과 밤의 시간 감각, 특정 장소에 결부된 모종의 정서를 촉발한다. 한편 <유동, 아주 밝고 어두운>(2023) 에서 작가는 한강을 걷고, 또 관찰하며 강물의 유속에 빗대어 거대 도시의 추상적 구조 내부에 자리 잡은 이 땅의 물리적, 상징적 변화를 살핀다. 근대 도시화의 과정에 깊이 개입된 장소, 자연과 인공의 충돌, 소멸과 생성이 거듭 반복되어 온 한강은 그 자체로 도시에 기반한 삶과 시대, 그 미시와 거시의 교차 가운데에서 삶의 유동성을 환기한다. 장소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삶의 '장(field)'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좌표나 추상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미셸 드세르토는 도시를 걷는 보행자의 동선을 일종의 언어에 비유하며, 지도 위에 짙거나 옅은 선으로 새겨지는 보행 경로들을 통해 도시를 읽어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거대한 도시 공간도 그 속의 미세한 흔적들—사람들이 오가며 남긴 이동의 궤적과 사소한 행위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번역된다. 이러한 면에서 강동주의 작업은 도시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개인의 몸짓과 기억이라는 언어로 다시 쓰는 시도이며, 거시적 시스템에 대한 미시적 해석이자 번역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장소적 감각의 물질적 전환은 문이삭의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조각가로서 덧붙이기라는 행위를 통해 가소성을 확장시키는 방법론에 관심을 가져왔다. 작가는 이를 “소조적”이라고 정의한다. 덧붙이는 대상은 자유롭다. 상황에 따라 그것은 물질적 연쇄와 확장을 거듭하거나, 비물질적인 개념의 연장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자신의 작업과 타인의 작업을 연결 짓는 태도이거나, 더 나아가 공간이나 이미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본 전시에서 문이삭은 '산'과 '바위', 그리고 '강'이라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보통 관념과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도시의 구성물이다. 작가는 이를 일종의 '사물'화 된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보통 사물은 경제성의 논리 아래 생산된 것, 극화된 심미성으로 빈곤한 역사를 대체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철학적 관점 아래 사물은 기능적 문맥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중립성을 내재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중립성은 실재와 이미지 사이 근원적 갭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성과 변이의 사건이 잠재하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렇듯 고정된 의미로 포섭되기 이전의 상태로 대상을 전제하고, 거기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양상, 그 경험의 구성에 관심을 가진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디디고선 땅에서 채집한 흙을 안료로 사용하거나, 가마에서 소성되는 조각의 조형토로 이용하며, 이를 통해 획득한 형상으로 오늘날의 매끄러운 이미지가 지닌 피상성과 대응하는 입체적 시점을 확보한다. 그의 조각에서 전경과 후경은 한 몸의 조각을 구성하고, 그가 마주했던 풍경은 켜켜이 쌓여 압축된 하나의 장면을 이루며, 수직과 수평으로 포개어지고 중첩된 구성 사이에서 (비)가시적인 시간과 공간의 경험, 과거와 현재가 비선형적으로 축적된 오늘과 일상의 서사는 물질을 경유한 생생한 경험으로 번안된다. 시점을 달리하며 여러 측면의 표정들을 포착하여 하나의 조형으로 압축, 조형하고 이를 다시 공간으로 확장하는 문이삭의 방식은 마치 영화적 시퀀스의 중첩으로 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한강이라는 보편적 이미지와 지금, 여기에서 감각되는 모습의 간극에서 생성과 전이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멈춰선 채 움직임을 추동하는 풍경으로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한성우의 작업은 재현과 해체의 경계면에서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총체적 감각으로 제시한다. 사건에 대한 인식은 맥락이 부재한 상태로는 온전할 수 없다. 사물은 환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며, 존재의 양식을 취한다. 화면 위의 구체적 대상이 흐릿해질수록 명시적인 정보에선 멀어지지만, 남겨진 물질의 자리에서 감각할 수 있는 상황은 배가된다. 잡힐 듯하다가도 이내 아스러진 형체는 이미지와 결부된 기존의 서사를 삭제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불분명한 이미지는 지워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대상의 현존에 대한 깊은 관심이며, 구체적 형상과 거리를 둔 ‘흐릿함’은 선명한 언어로서는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존재론적 양상에 대한 반응이다. 더 나아가 이미지를 구축하지만 동시에 흐트러뜨리는 것,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의 경계면에서 획득한 이미지는 재현을 위한 구체적 대상이 아닌, 작가와 대상의 정서적 호응, 대상과 주고받던 내밀한 시선, 그 시공으로 우리의 시선을 연장한다. 한성우는 과거부터 자신의 작업을 전경(前景)에 빗대기보다는 '뒤편' 이나 '뒷모습'과 같이 시선으로부터 떨어진 시공과 형상에 빗대어 왔다. 그의 언급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포착하려는 풍경이란 삶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하나의 명시적 장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히려 무대 앞의 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후 남겨진 것들의 장소, 그 폐허의 무질서한 감각과 닮아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삶이 주창하는 생명력과는 조금 다른 실존적 공허함이나 멜랑콜리함과 같은 정서로 충동하는 화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최근 작가는 그의 작업을 설명함에 있어 '부재의 정서'와 같은 표현을 동원하는데, 기실 '부재'는 망각이나 소실, 누락과 같은 개념과도 연동한다. 한성우의 작업은 허물어진 형상 속에서 대상의 부재를 감각하게 함으로, 즉 '부재'를 존재의 반대편에 선 언어가 아닌, 존재의 한 형식으로 자각하게 함으로 일상 속 존재와 그들과 관계 맺어온 우리의 현재적 양상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삶은 표상된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이차원 평면 위의 이미지로 점차 추상화되었다. 오늘의 일상은 스마트폰 속 끝없는 사진과 영상으로 가득 차 계속해서 재연되지만, 정작 그것들은 현실의 파편을 표피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일상의 흔적을 더듬는 일, 그것이 품은 시간의 깊이를 헤아리는 일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를 둘러싼 환경, 그 시공의 조건과 삶에 대한 인식을 확장한다. 본 전시에 참여하는 강동주, 문이삭, 한성우는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에 기재된 시간성과 장소성을 추상화하여, 새로운 감각의 지평 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빠르게 갱신하기만을 요구해 온 '오늘'이란 이름의 시제에 짓눌린 일상의 감각을 새롭게 자각하길 요구하는 동시에, 그렇게 취득한 세계의 깊이에 우리 스스로를 투사하길 요청한다. 이들은 미시적인 시간을 관통하는 신체적 경험을 통해 삶의 공간을 재구성하거나,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에 침투하여 다성적인 서사를 끌어내고, 부재를 직시하게 함으로 현재의 자리를 우리에게 되물으니 말이다. 우리는 강동주의 드로잉에서 미시적 삶과 거시적 체계의 교차면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선율을 그려낼 수 있으며, 문이삭의 조각에서는 지층처럼 쌓인 물질로부터 시간의 촉감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성우의 회화가 지닌 빈자리는 존재의 깊이를 되물어야 한다. 눈앞에 펼쳐진 흔적들은 더 이상 지나쳐버린 잔재가 아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제 사이에서 출현한 틈새로서 관객과 조우한다.

글/ 김성우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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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주, 문이삭, 한성우 ≪흔적의 깊이≫ 2층 전시전경 - A-Lounge Contemporar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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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주, 문이삭, 한성우 ≪흔적의 깊이≫ 2층 전시전경 - A-Lounge Contemporary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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