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고 위태로운 유령들

황윤중(자유기고가)


김덕훈이 이번 전시(「유령Spectre」)에 선보이는 화면들에는 모든 것이 응고되어 있다. 시간도, 공간도, 인물과 사물들도. 한순간 영원히 정지된 상태로 모든 것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여기에 ‘이후’라는 시간의 폭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보다 넓고 단순화된 면으로 딱딱하게 처리된 얼굴은 그려진 상태 그대로 단 한 가지 표정만을 영원히 지을 수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겼다. 덩어리로 묘사된 머리카락들은 결코 가위로 자를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단단해 보인다. 

더 나아가 그의 화면에 이러한 응고의 힘이 작용하면서 인물들의 생물적 속성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징후도 화면 밖으로 새어 나간 것 같다. 색채도, 눈동자도, 표정도 잃은 인물들은 마치 속이 텅 빈 존재들처럼 감각과 감정 능력을 상실한 무생물처럼 보인다. 이 그림들의 세계는 정적 속에 모든 것이 정지된, 동사 없이 명사만으로 이루어진, 그것도 생명이 깃들지 않은 ‘무정 명사의 세계’다. 그리고 이 과도한 무생명성은 지극히 평범하고 익숙한 외모와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들로부터 낯설고 기이한 느낌을 받도록 만든다. 대체 이 지극한 건조함, 무생명성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먼저 그가 그린 장면들의 출처를 살펴보자. 그는 다소 철이 지난 통속적인 영화들에서 장면들을 선택했다. 선택된 각각의 장면들은 영화 속에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사소한 장면들이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연계성도, 일관된 서사도 찾기 어렵다. 그는 일부러 ‘의식적 기억’의 층위에 남지 않았을 장면들, 달리 말해 ‘보았지만 보지 못한’ 장면들을 선택한 것이다. 너무나 사소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할 이 장면들은 우리가 잊은 과거의 시간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가 망각한 이 과거의 존재들을 ‘유령’이라고 부른다. 왜 유령인가? 

망각이 곧 과거의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평소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듯 하나 때론 우연한 기회를 통해 갑작스럽게 부활한다. 그리고 이 짧은 부활의 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은 사라진다. 이렇게 과거는 나타남과 사라짐의 운동을 반복한다. 죽어 있다 살아나고, 다시 살아났다 죽는다.  때론 살아 있고 때론 죽어 있는, 때론 존재하고 때론 존재하지 않는 이중적인 성격에 근거하여 작가는 그들을 유령이라고 규정한다.    

작가는 이 유령의 지위를 갖는 이미지들에 견고한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을 무겁고 단단한 물성을 지닌 조각상처럼 묘사한다. 이는 짧은 부활의 순간을 붙잡고 사라지지 않도록 굳건한 기념비를 세우는 행위로서의 그리기다. 또한 잊힌 과거가 의식의 지평 너머에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로 존재하는 방식을 암시하려는 듯 인물들은 아무런 생명의 징후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으로, 즉 모든 생명력을 상실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의 유령들은 이처럼 견고함과 무게감을 지닌 존재들로 묘사되며 자신의 실재성을 항변하는 동시에 모든 생명력이 마비된 자들처럼 존재한다. 그의 형상들은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과거의 이중적 지위를 동시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이 세계의 인물들이 존재하는 물리적 기반의 불안정성은 또 다른 층위에서 다시 한번 긴장감을 낳는다. 이 조각적 형상들의 응고 상태는 얇고 성긴 종이 위에 기반한다. 석고상처럼 견고하고 무거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사실 이들의 몸은 보기보다 성기고 연약한 살로 지어졌다. 가벼운 지우개질 한 번, 칼질 한 번에 지워지고 찢어질 수 있는. 따라서 화면 속 인물들은 이중의 감각을 촉발한다. 그들의 몸은 견고하고 위태롭다. 

그의 화면이 시공간을 응고시키듯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순간들과 현재 일어나는 순간들에 대한 지각 내용을 응고하여 보존한다. 하지만 불안한 조건 위에 성립된 화면 속 응고 상태의 위태로움처럼 기억 속 이미지 역시 그 소환 통로를 망각하는 순간 다시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긴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동안 과거는 그의 조각적 형상만큼이나 견고하게 실재하는 듯 보이지만 망각하는 순간 그 존재는 여전히 무의식 어딘가에 실재함에도 실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처지가 되어 우리의 의식에 포착되지 않는 심연 속에 격리되고 고립된다. 이처럼 어찌 보면 그의 조각적 소묘의 세계는 기억(과거)의 세계와 그 위태로운 처지를 공유한다. 그의 유령 시리즈는 기억의 세계의 관점에서, 기억이 주체가 되어 과거라는 유령의 이중적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시각적 형식을 연출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