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과 BBULL 

장승연 (미술사 연구자)

이번 전시의 제목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뿔’이라는, 관객을 향해 무심히 툭 던져진 것 같은 이 단순한 단어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어떤 형태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머리나 다른 표면에서 뾰족하게 솟아난 딱딱한 무엇이다. 전시장에는 일견 뿔이 자라고 있다. 길게 휘어지고 그 끝은 뾰족한 어떤 형태가 벽과 바닥에서 솟아 있거나, 실제 동물의 뿔이 덩어리에서 자라나듯 뻗어있다. 이들 작품의 제목인 ‘뿔나다’라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화가 나고 성이 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서로 다른 형태와 무게를 가진 덩어리들은 여러 가지 삶의 고민과 관계들을 상징한다. 나는 오늘도 쉽게 흥분하여 불끈 불끈 화를 내는 나를 다스리려 한다. 이 연작 작업에는 오늘도 뿔이 나지만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와 불확실한 미래인 내일이 있다.” 이처럼 작가가 덧붙인 솔직한 문장은 ‘뿔’ ‘뿔나다’라는 제목과 이 연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친절히 알려 준다.
   그런데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뿔’의 영어제목은 ‘BBULL’이다. 작가는 ‘horn’이라는 기존 단어 대신, 고심 끝에 ‘BBULL’을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앞서 ‘뿔’과 ‘뿔나다’라는 언어적 의미의 틀 안에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찰나, 이 낯선 단어가 다시 한 번 그 인식의 순간을 교란시키는 느낌이다. ‘뿔’이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기의와는 전혀 관련 없다는 듯, 그렇게 독립성을 획득한 ‘BBULL’은 조형적인 하나의 ‘형태’에 가깝다. 묵직하게 반복된 알파벳 대칭으로 단단하게 균형 잡힌 ‘덩어리’다. 말하자면, ‘BBULL’이라는 기호는 언어이자 제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형태’ 그 자체다. 이제 ‘뿔 BBULL’이라는 전시 제목은 그의 작업을 친숙한 사물이자 의미로서의 뿔로 보는 동시에, 온전히 새로운 형태로서 다르게 감각해보라고 제안하는 것 같다.  

박소영 작가가 그동안의 작업 여정에서 ‘형태’를 늘 중요하게 언급해왔던 점을 떠올리면, 앞서 제목에서부터 끌어 올려낸 ‘형태’에 대한 단상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은 형태를 만들고 형태는 미술을 만든다”던, 오래전 작가가 적었던 담담한 문장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여기서 노동이란 늘 반복되는 작가의 고된 작업 과정을 말한다.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사포질로 덩어리를 만들고, 조각의 표면에 인조 나뭇잎이나 패브릭 레이스, 혹은 비즈나 스팽글처럼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작디작은 재료를 촘촘히 붙여가는 반복 과정은 그야말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동반한다. 이렇게 수공적 노동이라는 예술의 한 방식을 기꺼이 떠안고, 그 과정 속에서 작가 내면의 생각과 감정들을 묵묵히 녹여가며 완성한 작업을 ‘자화상’이라고 불러왔기에, 그의 작업은 ‘전통적’이라고 불리는 예술의 방식과 가치의 측면에서 이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적” “소박한” 같은 수식어로는 그의 독특하고 예민한 조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채롭게 담아낼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은 그동안 노동이라 불렸던 작가의 고된 손과 마음의 과정들을, 다시 작가의 말을 빌려 “길들여지지 않는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보려고 한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다듬어내어 완성했을 ‘BBULL’이라는 형태처럼, 단일한 기의를 담는 그릇으로 고정되는 것을 피해가는 낯선 형태는 머리와 손의 지난한 노고 없이는 쉽게 포착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이라 불리는 그 과정을 거치며 작가는 삶이 남기는 버거운 잔재들을 털어가는 동시에 점점 더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는 낯선 입체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작업은 “정형으로부터 탈피한 형태 혹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형태, 혹은 우연적인 형태 같은 것”(이영욱)이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의 형태이며, 어떤 하나의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해석을 향해 열려 있는 잠재적인 ‘상태’로서의 형태에 가깝다. 
   그동안 박소영 작가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명료한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도, 그의 형태에서 수많은 ‘상태’들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심각하기를 애써 외면하듯 단순하고 유쾌하다가도, 왠지 서글프고 애잔한 마음이 느껴지는 그런 다양한 상태들이 공존하듯 말이다. 전시 직전, 작가 작업실의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무심히 놓여 있던 ‘뿔’이 붉은 큐빅의 광택을 반짝이며 도발적으로 보이는 동시에 한편으로 쓸쓸하게 느껴졌던 낯선 첫인상도 마찬가지다. 전시장에 놓인 뿔 달린 머리, 뿔 달린 덩어리, 뿔 달린 부서진 다리들은 또 어떠한가. 어떤 의미의 결말로 우리에게 독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상과 감정을 허용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모호함으로 끊임없이 의미의 미끄러짐을 일으키는 전복적인 형태에 가깝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오직 미술이라는 조형 언어이기에 가능한 대화를 제안한다. 

언어이면서 언어를 비껴가는 형태와 마찬가지로, 조각가로서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덩어리와 껍질’이라는 주제 또한 매우 양가적이다. 부피를 의미하는 덩어리와 표면을 의미하는 껍질이 조각의 물리적 구성요소로서 각기 극단에 위치한다면, 작가는 오히려 이를 한데 어우러지게 하거나 혹은 아예 서로의 극으로 끝까지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즉 덩어리라는 육중함으로 조각 고유의 부피와 견고함을 유지하는 조각, 혹은 유기적이며 흐물흐물한 덩어리로서 심지어 건너편의 장면까지 투영하는 얇은 비닐 막과 같은 극단적인 조각, 아니면 이 둘이 함께 결합된 조각까지, 그의 작업들은 조각이라는 장르의 숙명을 옹호하는 동시에 그 근원에 자리한 남성적 신화를 해체하려는 양가적인 실험에 가까웠다. 
  그런 작가의 작업 앞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그의 작업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비늘처럼 반복적으로 형태를 덮어버린 인조 나뭇잎이나 레이스 조각을 슬그머니 쓸어내릴 때 손바닥에 전해질 예민하고 가슬가슬한 느낌이 궁금했다. 수차례의 사포질로 마감된 ‘덩어리’들은 부드러울지 차가울지, 혹은 건조할지 촉촉할지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어떤 의미로 읽으려 하기 보다는 일종의 다른 감각, 예를 들면 부드러움, 보송보송, 건조함, 매끄러움, 서걱서걱, 차가움 같은 다양한 ‘상태’들을 떠올린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유난히 만져 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 ‘뿔’ ‘뿔나다’ ‘불끈불끈’이라는 글자를 정자체로 또박또박 써 놓은 드로잉은 액자나 배경도 없이 마치 스스로 돋아난 비늘처럼 전시장 벽에 까슬한 질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질감을 덧입은 ‘뿔’이라는 명사, ‘뿔나다’라는 동사, ‘불끈불끈’이라는 부사는 더 이상 읽어야 하는 글자가 아니라 촉각을 일깨우는 또 하나의 형태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질감이 느껴지는 아주 아주 얇은 막과 같은 조각일 수도 있다. 
    ‘자신’이라는 아주 가깝고 밀접한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박소영 작가의 조각 언어는 다채로운 이질성을 포용하는 낯선 형태로 머물기를 자처한다. 때론 촉각성 같은 새로운 감각을 끌어들여 조각의 시각적인 경계를 넘어서기도 하며, 사건이나 장면이 아닌 상태의 미술로서 늘 미완의 결말을 향한다. 이는 분명 거대서사가 되려고 여전히 애쓰는 동시대미술의 한결 같은 선형적 흐름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 흐름에 어떤 예민한 갈림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늘고 연약해 보이지만 아주 깊고 단단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