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영, 유근택 2인전
시지프스의 땅 The Land of Sisyphus
에이라운지 2019.4.26~5.25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시지프스  신화가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는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제우스의 분노를 사기도 하고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기도 했다. 장수를 누리고 다시 저승으로 간 시지프스는 결국 산 정상에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산의 꼭대기가 뾰족한 나머지 바위는 계속 굴러 떨어졌고, 그는 끊임없이 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했다. 영원한 형벌을 받은 것이다. 

기존 신화 속에서 시지프스는 못된 지혜를 가진 교활한 왕으로 표현되지만,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그가 행한 일련의 행동들은 신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한 일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알베르 카뮈는 1942년 발표한 철학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죽음만이 기다리는 상황.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카뮈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특히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이에 대해 대결하고 반항하는 삶.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우리에게 이 시지프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에이라운지는 ‘시지프스의 땅’이라는 제목으로 김승영, 유근택 작가의 2인전을 연다. 현재 한국 동시대 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중견작가는 회화와 영상, 설치 오브제라는, 서로 다른 매체와 형식의 작업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엮어낸다. 먼저 두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자. 김승영은 과거 선보였던 <자화상>과 <마음>, <돌> 등을 통해 자신의 삶, 마음의 풍경을 드러낸다. 돌, 이끼, 물, 흙 등 다양한 자연의 오브제들과 이와 연결된 영상은 유기적이고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삶의 현실,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등신대로 출력한 자화상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떨어지면 붙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는 <자화상>과 북쪽을 향하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는 나침반은 작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자신의 사진을 벽에 붙이고 있는, 무한 루프하는 영상과 기계적 장치에 의한 작업 속 혼돈은 작가가 품고 있는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질문이자 확인이다. 유근택은 작가 주변의 풍경, 줄타기하는 작가와 자화상 등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작업 방식이 독특한데, 종이 위에 두텁게 안료를 바르던 방식과 함께 최근에는 수 겹의 종이를 배접해 그 위에 그린 후 철솔로 두드려 입체감을 내는, 도상과 함께 재료의 물성이 부각되는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유근택은 ‘몸의 언어로서의 동양미학’, 작업을 대하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시지프스가 매일 바위를 굴려 올리듯, 작가는 자신의 화폭에 끊임없이 철솔을 두드린다. 경건하지만 고통스러운 구도(求道)의 길을 걷듯, 작가는 눈과 손의 작업을 몸 전체로 확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화면은 마티에르로 인해 입체적이지만 도상은 오히려 평면적이다. 형상성과 추상성이 공존하는 기묘한 깊이를 드러낸다. 구체적이지만 보편적인, 그래서 본질을 모색하는 여정이 작품의 레이어 속에 오롯이 담겨있다. 

‘시지프스의 땅’이라 이름붙인 전시는 두 작가의 다양하고 차별화된 작업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작업이 결국 자신의 삶, 정신성, 방향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의 결과임을 드러낸다. 특히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작업세계가 대한민국의 미술작가로 살아가는 50대 중반, 중견작가의 현실을 드러내는 듯 하다. 중견작가가 굳건히 디딜 수 있는 땅은 어디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지, 그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김승영과 유근택이 표현하는 ‘땅’은 일종의 현실이자 시간의 세계다. 시지프스의 세계에서는 이 땅조차 영원과 순환의 세계로 귀속되지만, 우리에게는 변화를 행하고, 그 속의 본질을 찾아가는 바탕이 된다. 

전시장 한 켠에서 김승영의 <자화상>과 유근택의 <자화상>이 하나의 공간에서 마주본다. 유근택은 자신의 자화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항상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화가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행위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현존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중략)…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코너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행위이다. 그곳이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이며 그 극단의 코너로 밀면 밀수록 죽음과 삶이 가장 가까이서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장소가 된다. 그래서인지 자화상의 대상은 항상 어둠과 빛의 사이의 투쟁이다. 그것은 어둠을 관통하려는 의지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느끼곤 한다. 또한 그것은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회피하거나 숨으려 한다는 것이 아닌 그 어둠과 정면에서 직면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일이다”라고. 

두 작가의 <자화상>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자신의 자화상을 붙이고 거울을 바라보고 어둠을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행위는 지금 자신의 작업에 또다른 꼭대기를 향해 돌을 굴리는 것이라고. 또다른 자신을 찾아 새로운 작업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것이 아무리 지난(至難)한 일일지라도 할 수 밖에 없는,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라고 말이다. 

카뮈가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에 살아가지만, 실상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존재의 죽음이다. 그 부조리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우리에게 삶의 용기를 주는 희망과 유토피아, 낙원에 대한 꿈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게 그 존재를 어필한다. 혹자는 이러한 희망과 소망이라는 개념이 심리학적으로 나쁜 감정이라고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버리고 운명에 순응하여 답이 없는 문제 속에서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할까? 두 작가는 자화상과 일상의 풍경, 자연의 법칙을 통해 영원한 삶의 고민과 고난에 반기를 든다. 꼭대기에 돌을 올려놓을 수는 없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시행한다. 죽음이라는 결과를 내놓는 시간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희망이 된다.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 있고, 시간이 흐르기에 그 희망을 이루려는 용기를 이끌어낸다. 결국 우리는 이 ‘시지프스의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삶을 직조하는 새로운 ‘시지프스’를 꿈꾼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사진을 붙이고 나 자신을 그린다. 김승영의 돌 속에 빼꼼히 드러내는 이끼는 이 생명을, 희망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새로운 생명이 시간을 이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는 의지이기도 하다. 

『시지프의 신화』의 마지막 구절에서 카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이렇게 우리는 두 작가를 통해 ‘행복한 시지프스’의 세계를, 그리고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의 멋진 세계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