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신자에게 도착한 불연속적 환상들

박지형 ( 독립 큐레이터)

기괴한 장면들 틈에서 살아남은 것들을 본다. 캔버스 표면 위로 조각난 잔해들이 붙어있다. 부러진 것, 녹아내린 것, 낡아 희미해진 것, 혹은 누군가 버리고 간 것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물리적 좌표를 어느 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은 채, 작가는 파편적인 경험이 드나드는 주관적 회로를 통과한 이미지들을 재편집하며 화면을 조직한다. 비현실적인 배경의 게임, 만화, 영화에서 등장하는 효과나 장면들, 혹은 일상의 사건과 허황된 상상들 간의 반복적인 이접과 교배가 회화를 생산하는 자원이 된다. 때문에 그림은 전적으로 작가의 내면 상태에 의존하지도, 지독한 사실적 관찰에만 무게를 두지도 않은 애매한 무엇이 되어있다. 여기는 중세 시대 전쟁터도, 인류가 사라진 뒤의 미래 도시도 아니다. 그는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윌리엄 터너는 작품 <비, 증기, 속도>(1844)에서 산란하는 빛과 공기를 메우는 증기의 인상을 포착했다. 그림의 기저에는 고도화된 기술로 인해 빠르게 진화하는 당대 풍경을 목도하는 한 개인의 시점이 전제되어 있었다. 전시 《광선, 증기, 어둠》에서 보게 될 박신영의 근작들에도 동시대의 숨 가쁜 변화와 왜곡을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된다. 다만 현재의 광경은 터너가 마주했을 그것과 사뭇 다르다. 지구 생태는 전쟁, 질병, 테러, 환경 오염 등의 균열을 겪으며 끝없는 불확실성 속으로 미끄러져가는 중이다. 또한 일상화된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인류의 신체 기능을 기계와 이질적으로 결합시키며 현실과 가상의 구분에 관한 절대적 근거를 지워버린다. 작가는 흔들리는 세계에 도사리는 위험과 불안정성에 격렬하게 저항하지도, 굴복하지도 않는다. 대신 아포칼립스와 같은 시대를 관통하며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과 기묘한 끌림 사이를 줄타기하며 육화되는 감각들을 시각화한다.

한 인물의 경험은 결코 단일한 언어로 객관화될 수 없으므로, 작가의 평면은 점점 더 모호한 형상을 품은 채 재현-비재현의 경계면으로 이동한다. 더구나 애초에 구체적 상황을 설정하고 화면을 운용하기보다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입력된 단상들을 개연성 없이 나열하거나 뒤섞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작품은 제목과 달리 특별히 제시하는 사건이 없다. 대신 드문드문 심어놓은 판타지적 요소들이 관객의 상상력을 주무르는 작은 단서가 된다. 안개와 같은 물감 층위들이 생명체의 뼈대가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출렁이는 붓질의 중첩과 배경에 뒤섞여 있어 공간을 장악하는 무형의 기운 속으로 용해되어 버릴 것만 같다. 말하자면 그려진 대상들은 물감의 장막 밖으로 드러나는 중이기도, 반대로 사라지는 중이기도 하다. 죽었으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유령을 닮은 불투명한 잔상들이 소멸과 어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응축된 힘을 발산하며, 풍경 속에 생존하며 이야기의 공백을 채운다. 

그의 회화는 독해 가능한 일련의 정보 값을 제공하기보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중첩되어 혼재하는 무시간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기형의 에너지를 물화하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특히 위태로운 시공 속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크고 작은 개체들의 진동이 복잡미묘한 인상으로 발화하는 모습은 수 세기 전 터너가 그려낸 증기와 기차의 동력이 보여준 즉물적인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풍경화라는 장르가 현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하나의 지류라면, 박신영이 생산하는 것은 현시점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문명 비판적이면서도 공상적인 통찰력이 응집된 촉각적 풍경화로서 시의성을 갖는다. 결국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가 세계라 지칭하는 것은 확실성의 영역에 존재하기보다 경험 속에 실재하는 수많은 움직임들의 연쇄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지대에 있다. 그리고 의미화의 과정에서 작가의 몸은 세계와 이미지, 관객을 매개하는 하나의 항으로서 작동함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 행성을 끈질기게 탐사하며, 내일의 수신자에게 오늘의 감각을 송신하는 타임 슬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