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6장 2절: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장진택 ( 독립 큐레이터)

A. 언젠가는 믿어왔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결코 그 순간이 자신에게 도래하기를 단연코 원치 않았을 것임에도, 누군가의 성배는 그토록 급작스럽게 스러져 버린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이미 쌓아 올려진 성배를 우러를 것만을 배웠을 뿐, 그것이 파괴되어 버린 그때에 대해서는 어떤 준비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기인한다. 성배는 반드시 신성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또한 고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스러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아래에서 위로 상향하도록 교화받았으므로, 그 뜻을 조금이라도 부정하거나 돌이키는 일은 절대로 없었어야 했다. 성(聖)과 속(俗)의 그 지리하고 멸렬한 대치 속에서, 인간은 아마도 축복이라는 대칭의 지렛대에 기대어 결코 성현(hierophany)하지 못할 본성을 무던하게도 그저 기다릴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제단 위에서 그토록 단정하던 그 부동의 성배가 눈앞에 추락했다. 도대체 누가, 그리고 왜 그것을 넘어뜨린 것일까.    

B. 이동혁의 작업에서 종교의 소재는 꾸준하게 그 서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작가에게 당연한 삶이었으며, 곧 믿음이었고, 그렇게 현시하는 세계였다. 신화와 역사의 사이, 그 어딘가 즈음에서 종교는 일으켜졌다. 그 특정한 시공 가운데서 작가는 어느 한쪽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단지 물끄러미 저들을 바라본다. 일인칭도, 그렇다고 완전한 삼인칭의 주체로도 편승하거나 이탈하지 못하는 이동혁의 자리는 종교와 사회 그리고 제도와 정체성 사이의 약속된 관계를 사실상 무색하게 만든다. 그러한 작가의 태도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재고하는 것으로부터 출현하며, 그가 품어낸 미약한 의심의 발아는 점차 큰 파열의 혼돈을 초래했다. 이렇듯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지금, 너무나도 충만한 빛을 따르다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린 존재들은 궁극적으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곳에 있었던 그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를 찾는 구원의 형식과 그 과정에 매몰되었던 너와 나를 비로소 올바르게 구조하고 인도하는 우리의 역사(役事)와 크게 다르지 않을테다.   

C. 때로는 요란한 망치질과 분란한 외침보다 차분한 응시와 고요한 침묵이 바위를 깨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견고한 제도와 신실한 믿음의 증명, 그 구애(拘礙)를 넘어선 찰나의 체험이 실로 참된 깨달음에 우리를 도달할 수 있게 함을 우리는 분명 알고 있지 않았던가. 본디 어지러움을 잠재우고자 성찰은 수행되어 왔다. 이동혁의 전시 《침묵이 바위를 깰 때》는 무엇을 채우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비워 내버린 그 자박적이고 당착적인 어려움과 불편함을 상기한다. 창제의 근원을 향해 정진하는 신념은 어느 순간 그것을 가려버린 장막이 되었다. 실체는 멀어졌지만, 다시금 다가가야 한다. 비록 바래어지고, 거칠어졌으며, 굽어지거나, 얽혀버렸을지언정, 여전히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을 것을 그는 역설한다. 시련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괴롭혀왔다. 다만, 그 헤침의 가능성은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돌아볼 때야 임할 수 있다는 영원의 교훈을 잊지 않기를 이동혁은 진실로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