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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GZAK

와그작

[WAGZAK] 홈페이지

와그작! 하고 꽉 베어 물면 달콤 고소 짭짤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질 것 같다. 어린 시절 입안에서 돌돌 굴렸던 캔디처럼 아찔하리만치 경쾌한 이 의태어는 고칼로리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냉장고 깊숙이 몰래 숨겨둔 궁극의 디저트로 지친 일상을 잊는 ‘와그작 타임’. 그런데 우리는 오직 디저트의 달달한 ‘맛’에만 빠진 걸까?
반세기 전의 미술가들도 디저트 도상에 주목한 적이 있다. 팝아트는 일부 귀족들만 누려오던 고급 다과가 값싼 과자로 대량 생산되고, 이것이 싸구려 마트의 진열대에 빼곡히 진열된 현상을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 케니 샤프의 도넛과 웨인 티보의 케이크는 ‘과잉과 과적의 소비 사회’를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제 동시대에 디저트 이미지는 일상으로의 보급 차원을 넘어, SNS의 대홍수를 타고 오프라인으로 범람해 현실을 역습하고 있다. 실로 총천연색의 파티스리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단순히 그 맛에 군침을 싹 닦기보다도 탱글한 이국의 과일과 녹진하게 흐르는 시럽을 내 핸드폰에 박제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는 데 집중하게 된다. 그야말로 ‘눈으로 더 맛있게 먹는 시대’이다.
디저트가 오감을 홀리는 ‘푸드 포르노’의 주인공이 된 데에는 그것이 ‘금단의 열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쿠키, 마카롱, 다쿠아즈, 크로플, 카눌레, 탕후루···. 입은 즐겁지만 몸엔 해로운, 그래서 어릴 적엔 부모의 감시로 통제됐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어마어마한 당분의 압박에 마음껏 먹을 수는 없는 디저트에는 보이지 않는 양심의 상한선이 존재한다. 때문에 디저트를 갈라 먹는 기쁨(pleasure) 이면에는 완벽한 표면, 환상적 금기에 흠을 내는 죄책감(guilty)이 있다. 와그작은 그렇게 균열의 신호가 된다.
사실 ‘와그작’의 사전적 의미에도 뻥튀기의 송송 뚫린 구멍처럼 ‘틈’의 가능성이 숨어있다. (1) 여럿이 좁은 곳에서 시끄럽게 복작거리는 소리나 모양. (2) 질기고 빳빳한 물건이 마구 스치거나 쓸릴 때 나는 소리나 모양. 그러니까 와그작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마찰을 내는 행위에 가깝다. 단순히 디저트를 분지르는 동작뿐만 아니라, 통통한 알맹이를 포장지로 감쌌다가, 이를 꺼내 왁자지껄 나눠 먹는 총체적인 과정이 ‘와그작’인 것이다.
《WAGZAK》은 디저트의 모양, 포장, 나눔을 개괄할 수 있는 의태어에서 출발했다. 장경린은 한입에 쏙 먹음직스러운 ‘디저트 조각’을 만든다. 작가는 일상에서 실제로 먹은 디저트의 맛과 형태, 그리고 그때의 기분을 상기해 동그랗고 쫀득한 입체물로 빚는다. 특정 순간을 응결한 그의 조각은 디저트로 쓴 ‘추억 레시피’이다. 소민경은 ‘음식 사진’을 그린다. 그리드와 레이어로 분할되고 패턴과 형상이 중첩된 그림은 마치 위장술로 둘러싸인 듯하다. 포슬포슬한 화면에는 개암 껍데기, 감자 껍질, 빵의 용기(容器) 등 ‘겹’의 흔적이 남아있다. 작가는 내용물을 보호하기도, 교란하기도 하는 포장에 주목해 음식의 ‘존재론’에 접근한다. 최수진은 강아지 파티시에가 꼬물꼬물 디저트를 만들어 (동물) 친구들과 오순도순 나누어 먹을 파티 준비를 상상했다. 이들이 주최한 파티는 꿈과 현실이 흐려지는 낭만의 순간이요, 그곳에 차려진 포춘 쿠키는 새로운 세계를 점지하는 운명의 텔레포트다. 작가는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세계의 경계를 단란한 마음으로 용해하려 한다.

글 / 김해리 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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