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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사이로

2024. 3. 8 -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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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하고/ 고집스럽고/ 아름다운...

작가 김미경의 작품은 아름답고, 동시에 ‘완고’하다. 작품은 눈 내리는 날 시 읽는 풍경처럼 서정적이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고집스럽고 올곧아 보인다. 작품은 분명 색채와 형태 그 무엇도 과도한 자기 주장 없는 균형미와 세련미를 지니고 있지만, 화면 속 모든 요소들이 타협 불가 절대 요소처럼 버티고 선 듯 보인다. 극도로 역설적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의 과정 자체는 빈틈없고 치밀하게 이뤄질 수 있겠지만, 예술의 결과가 완고해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고민해 보게 된다. 작품에 대한 느낌을 의인화한 이 ‘완고함’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 작업의 과정이 철저한 설계와 명확한 의도로 이뤄져 즉흥적인 요소나 우연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성과 보수성이다. 둘째, 게으름에 타협하지 않고 어리숙함에 기대지 않는 결과로부터만 나올 수 있는 단단함과 견고함이다.
또다시, ‘아름답고 동시에 완고한’ 작품들을 마주해 본다.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고집스럽고 견고해 보인다. 화면에는 결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선, 강렬한 색채배합, 역동적 기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만이 존재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쌓아 올려진 듯한 영겁의 안료 흔적과 지극정성 돌탑 같은 숫자 더미들이 화석처럼 버티고 있다. 때문에, 작업에 필요했던 긴 시간과 과정들은 모든 것이 그저 원래 자리를 찾기 위한 기다림과 시행착오일 뿐이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이에, 완고함의 두 가지 해석 가능성 속에서 단 하나의 정답 선택을 그만두기로 한다. 나머지 답을 완전히 폐기한다면 무언가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두 해석 사이를 적절히 오가는 것을 택한다. 작가 김미경만이 점하고 있는 미묘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가 즉흥과 우연을 다루는 방식, 시간을 묵히는 태도 등과 관련이 있다.

고요 속의 진동 – 정지가 아닌 움직임
작가는 사전에 작품의 결과를 예측하거나 정해 놓지 않는다. 그저 대략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지도가 아닌 길 위에서 길을 따라 몸을 맡기는 방식에 가깝다. 물론 작품이 완성됨에 있어 작가가 꾸준히 실험하고 정립해 온 조형적 성과에 기반 한 관성이 작용할 것이다. 최종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고 그 결론에 맞춰가는 방식과는 멀다. 작업의 모든 요소가 사전에 작가의 통제와 관리하에 있지 않으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선택의 과정에서 흡사 부름(calling)을 받듯 앞으로 나아간다. 작품을 마무리 짓는 순간 역시 그러하다. 이 방식은 시간 속에 머물고, 기다리고, 묵히는 것들을 통해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의 부름이나 우연성에 따르는 것들이 3차원 현실 너머의 영적, 초월적 경험을 일컫지 않기에 완벽히 작가의 통제와 의식을 떠난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우연은 작가가 수용하는 선에서 가능한 우연이며, 부름 역시 응답하는 자가 존재해야 유효한 본질을 지닌다. 시간을 두고 보고 또 보고…. 철저한 의식 속에서 매듭지어지는 것. 때문에 작가 김미경에게 우연과 즉흥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작동된다.
작품들은 고요해 보인다. 이는 상당량 절제된 색채와 정돈된 구성에 기인할 것이다. 우연과 즉흥조차 곱씹으며 차분한 의식 세계로 끌어들이며 선택해 나간 그 과정의 결과물 말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와 과정으로 인하여 고요한 침묵의 화면에 역치가 일어난다. 화면을 ‘가만히 깊게 마주하며 시간을 두고 보면’, 어떤 내밀한 에너지 흐름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진동은 작가가 그려낸 일루젼(illusion)의 종류가 아닌, 길고 고된 그리고 반복적인 작업 과정들 속에서 만들어진 여러 흔적의 양상과 관련이 있다. 재료와 행위의 물리적 흔적들이 과정의 증거가 되고, 과정의 증거이자 흔적은 시간의 흔적이 된 것이다. 작가가 투입한 시간들, 즉 작업의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관람자 역시 그 어느 때 보다 작품 앞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단지 화면 곳곳에 촘촘히 새겨진 이미지와 남겨진 흔적을 발견하는 가시적 단계가 아닌 그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이는 마치 죽은 듯 잠잠한 대지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야만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고 그 자연 속 삶의 본능과 원천을 자각할 수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이때 융통성 없고 올곧고 빈틈없는 ‘완고함’은 아우라(aura)를 지닌 ‘고요 속의 진동’으로 바뀌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 세밀한 흔적들이 실재적인 에너지의 진동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예술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매우 비이성적인 사건이자 지극히 예술적인 사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조우로부터 연결로 – 점강과 점증
우연한 만남과 발견은 예술가에게 큰 영감을 준다. 이는 작가 김미경에게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에 연결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단, 작가에게 있어 특별한 부분은, 새로운 발견을 단편적인 활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작업에 유기적으로 연결해 간다는 점이다. 마치 큰 뼈에 작은 뼈를 잇듯, 나무에 접을 붙이듯 어떻게든 조화롭게 붙여 나간다. 그 결과들은 이질적이지 않으며, 근간에 흡수되어 사라지지도 않는다. 작가는 새 발견을 기존의 다른 요소들과 연결하여 확장해 가며 자신의 특정한 양식을 발현,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작가는 발견의 대상과 자신이 ‘감정적으로 연결’ 되었을 때 그것을 작업의 장으로 더 적극 연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2016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윤동주의 하늘’ 모티프의 연작은 작가가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28세의 나이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아픔이 ‘감옥’과 ‘하늘’의 병치를 통해 극대화 되었고 ‘하늘’에 대한 개인적 서사가 만들어진 셈이다. 하늘을 위한 빛에는 고려청자의 옥색 빛이 추가되고, 사각 캔버스는 하늘 조각을 이어 붙인 듯한 회화 설치 작업으로 고안되었다.
작가는 몇 가지 주요한 모티프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 작업에 다양한 방식으로 걸쳐 등장하는 중심 요소이자 핵심 근간이 그리드(grid)다. 그리드적 요소가 누락된 작품을 찾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드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자기에서 출발 되었다. 보자기는 격자 형태의 근간을 지녔지만 어떤 것이든 감싸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으로는 납작하면서 동시에 입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속성을 지녔다. 작가는 보자기 혹은 조각보의 이런 속성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리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그리드는 작가에게 이 세상을 보는 프리즘으로 되었다. 보자기/조각보와의 만남과 발견, 감정적 조응과 의미 부여의 과정을 통해 연민, 용서, 이해, 치유 등을 가능케 하는 여러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 지향과 역동의 가능성을 조용히 떠올려 본다.
작가가 발견하고 연결하여 사용하는 모티프들은 서로 단절 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건 연결되어있다. 투명한 생선(Transparent fish) 시리즈는 글래스 켓피쉬(glass catfish)라는 뼈가 들여다보이는 물고기에 관한 연작이다. 작가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등뼈, 척추, 줄기 형태 자체를 표현한 작품이다. 나무를 매우 좋아하는 작가는 이 투명 물고기의 뼈를 통해서도 나무의 구조를 발견하고, 또한 지속하고 있는 그리드 시리즈의 연속으로서 다루고 있다. 새로운 소재가 등장하더라도, 결국 작품의 색상과 전반적인 구성면에서는 기존 작업들과 일관성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가 작업의 방향과 형식적 근간을 줄곧 일관되게 이어 가며 그 사이사이 곁가지들을 붙이는 작업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다양성 속의 일관성, 일관성 속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예술의 이상적인 추구 단계를 성공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한편, <The Origin>과 <Mountain> 시리즈 등에서 볼 수 있는 숫자 ‘1, 2, 3’은 작업의 출발점이자 평면과 입체를 구분하지 않고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깨알 같은 크기로 제작된 탓에 가까이 다가가야 발견되는 이 숫자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모티프는 바로 “엄마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자식 셋’을 낳고 열악한 조건에서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평생을 애쓰신 엄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공감의 의지로서 말이다. 그 서사를 낱낱이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이는 숫자 ‘1, 2, 3’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사실 이러한 단서는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롯이 작품과 독대하여 얻을 수 있는 종류는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상징성이 작동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관람자가 직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숫자들의 크기와 양에 있게 된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이는 크기의 숫자들을 마치 돌탑을 쌓듯 적어 넣고 새긴 이 일련의 ‘행위’가 어떤 기원(祈願)과 간절함을 표상한다고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식 세 명을 뜻하는 숫자 ‘1, 2, 3’을 빼곡히 적어 넣는 작업 과정은 수행적(performative)이며, 숫자들로 가득 찬 화면은 별도의 색면(couleur field)으로 보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노동과 시간을 투입한 결과다. 참으로 지독스럽다. 그리고 아름답다.

부정과 오류를 통한 전진 – 역설의 향연
김미경의 작품은 아름답다. 너무나도. 지독하게. 특히 거의 흰빛으로 마무리되는 절제된 화면의 오묘한 색상과 흔적들이 매력적이다. 화면에 숨어있는 듯한 다양한 색들은 분명 자기만의 고유한 색의 자리를 지니고 있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다른 색채로 명명하거나 구분하기보다 그저 다양한 종류의 흰색으로 바라본다. 색(안료)을 다룸에 있어, 작가는 ‘대지의 색’(주어진 색)이라 부르는 어두운 밑칠을 기본으로 시작하고 그 위에 다양한 ‘세상의 색’(발견한 색)들을 얹고 ‘하늘의 색’인 흰색을 가감하며 얹는다. 그러나 단순한 채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색을 바르고(applying) 갈아내고(sending) 다시 덧바르고 갈아내는 끝없는 반복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두 행위의 선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러한 순간들에서는 색을 올리는 것은 표면을 갈아내기 위한 준비가 되고, 마찬가지로 갈아내는 것이 다음 색을 바를 준비가 된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 선후 관계가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는 저해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화면에 활력과 창의성을 부여하는 새로움의 원천이 된다.
오류는 화면 밖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작가는 이를 오류로 부르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일차적으로는 단정하게 정리된 화면, 가지런히 줄 맞춰 빼곡한 숫자 군집, 차분히 가라앉은 색조들이 차분하게 보인다. 우연성, 불확실성, 모호함, 불규칙성 규칙과 질서가 근간에 위치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가는 땜질하고 고치는 것을 통해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을 뜻하는 틴커링(Tinkering)을 언급하며 그것을 인생에 비유한다. 실수하고 고치고 다시 반복하고 또 고치고 그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 아마 인생일 것이라고, 사실, 나만 불행한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오류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인생의 깊은 페이소스(pathos)를 담음과 동시에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뤄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부는 있고 테두리는 없는 – 삶
작가가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표면 아래에 엄청난 시간의 압축과 정반합의 역설을 심어 놓았다는 사실을 되짚어 본다. 삶의 아이러니를 담은 대다수 작가들의 작업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단계에 머무는 반면, 김미경은 삶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관념을 신체적, 물질적 실천으로도 연결하여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점이다. 심지어 ‘우연’과 ‘발견’에서조차 그 대상들을 결결이 자르고 들어가 새로 재단하고 자신의 작업 과정에 자연스럽게 수렴되도록 이어 붙이고 있다. 사전에 모든 걸 치밀하게 계획하고 구성하지 않지만, 작업의 과정 속에서 시간을 비교적 오래 두고 보며 신중한 선택들을 이어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작가적 개입과 의지를 보면, 이는 강박적 예술 본능과 삶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서두에서 언급한 완고함에 대한 첫째 해석에 가까울 수 있다. 부정적 해석이라며 의아할 수 있겠으나, 예술에 있어서, 아니 삶에 있어서 과정상의 오류나 실패가 종말이나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의 회로 속에서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게 뱅뱅 도는 듯한 폐쇄성이 부정되고 버려야 할 것은 아니다. 이런 판단은 관점과 시선에 의해 결정된다. 어떠한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할 수 있다. 행위자의 내적 논리 속에서 필요와 불필요, 쓸모와 무용함을 외부인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가. 프랑스 속담 “La nuit porte conseil”을 “밤이 선생이다”로 의역한 황현산 평론가는 고통스럽게 만드는 질문들이 그 과정에서 우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반영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작업’, ‘삶 그 자체인 작업’이라는 명제는 선명하지 않고 막연하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고사하고 한 예술가의 작업을 아는 것에조차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를 나는 다시 반복하게 된다. “김미경 작가의 작업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반영한다.”라고. 그 이유는 작가가 이 명제를 관념적 작업이 아닌 ‘실천적’ 작업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무엇이라고 여전히 단언할 수 없지만, 삶에 대하여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는 것, 삶은 모순으로 점철된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것,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다는 것이라는 점들을 열거해 본다. 특히 자기 세계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내는 듯한 작가는 “자신의 회로 속에서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게 뱅뱅 도는 듯한 폐쇄성”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한다. 그것은 나선형(spiral) 구조에 관한 것으로서, 작업의 모든 노력과 과정들이 결국 하나로 연결되고 환원되지만, 그것은 제자리 반복이 아닌 확장해 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삶과 예술 모두 결국 그렇게 고쳐가며 다시 또 시도하며 성장을 이뤄가는 것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삶 그 자체를 투영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결코 그 어떤 식으로건 삶을 모두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을 열게 한다. 고치고 메꾸고 나아간다, 그저 ‘틴커링(Tinkering)을 할 뿐’이라는 태도다. 이것은 전술한 나선형 작업세계 및 삶의 관점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관과 세계관을 보다 빛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눈물겹도록 오랜 시간을 담보로 하는 개념의 물질화와 물질과의 사투일 것이다. 이는 자리에 앉아 행하는 지적인 계산의 힘을 능가하는 일이다. ‘칠하고, 갈고, 새기고, 기다리고, 고치는’데 사용된 길고 긴 ‘시간’은 물질과 노동 사이사이에 켜켜이 들어간 성수(聖水)와 같아 김미경의 작품을 특별하게,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전히 고집스럽고 지독하고 폐쇄적으로 보이는 작업들. 그러나 그 외로운 은둔적 과정 덕택에 우리는 어떤 완전한 질서를 지닌 우주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여전히 화면 속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어 보이지만, 실수와 오류를 고쳐가며 나아가는 나선형 속에서 삶의 실체와 예술적 완성을 찾아가는 자세로 인하여 나는 김미경의 작업을 내부는 있고 테두리는 없는 어떤 유기체로 상상해 본다. 테두리가 부재하므로 무한대로 외부를 향해 뻗어 나가 연결, 확장할 수 있으며, 유기체이기에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작품세계이다. ‘틀리면 고치고, 또 틀렸으면 또 고치면 되지요’라는 작가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숫자 쓰기와 같이 가장 힘든 작업을 고쳐가며 잘 완성시켰을 때 그것이 주는 희열과 고양감이 좋았다는 작가는 아이처럼 웃었다. 언제든 몇 번이고 고치고 메꿔 나가며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 삶은 어쩌면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이 한 번 더 들려온다.

글, 김소원 (학예연구사, 성북구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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