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Still Some Light

아직 약간의 빛

2023. 3. 10 -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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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필자는 도시의 정경을 모티프로 했던 2000년대 중반의 이제의 작품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살았던 금호동 일대의 재개발될 장소들을 마치 소풍 장면을 그리듯 엷고 가벼운 필치로 포착한 그림들이었는데, 도시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냉철한 비판보다 그가 애정을 가졌으나 곧 사라질 것들을 바라보는 정감이 전해졌다. 이러한 그의 그림에서 당차면서도 여린 인상을 동시에 받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재개발이라는 사회문제에 대한 시선이 가장 개인적인 감각과 교착되는 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제는 그간 회화 작가로서, 도시 문제를 다룬 ‘기는 풍경’ 콜렉티브의 일원으로서, 전시공간의 운영자로서 동시대 사회가 요청하는 역할을 자신의 방식대로 명민하고도 진지하게 수행해왔다. 이러한 활동을 관통하는 것은 사회를 향해 열린 시선을 견지하면서 사회적 맥락 안에 자신의 개별적 감각을 자리매김하는 태도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의 회화 작업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재개발 이슈와도 같은 사회 비판적 주제의 맥락에서는 포스트민중미술의 계보와도 연결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화된 정감을 담아낸 회화적 정경을 미학적으로 모색하는 태도를 드러냈었다.
신한갤러리(구 조흥갤러리)의 《우리의 찬란한 순간들》(2005), 갤러리 킹의 《꽃배달》(2010)과도 같은 그의 2000년대 중반 이후 개인전들에서 발표한 그림들은 곧 재개발될 동네의 모습 혹은 재개발 현장, 노동의 장면들을 다루었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직설적 언급 대신 쉽게 사라져버릴 것 같은 대상들의 임의적 상태를 옅은 필치로 담아냈다. OCI 미술관의 개인전 《지금 여기》(2010)에서 전시된 <여기>(2010), <너의 노래_지혜>(2010)와 같은 작품들에서는 재개발 현장을 목격하며 서 있는 자신의 존재가 경험한 감각에 집중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바깥의 현실을 기록하는 방식에 있어서 화가로서의 몸의 감각을 활용한다. 예컨대 <더미>(2010)나 <섬의 가능성>(2010)과 같은 작품을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재개발 현장 자체가 아니라, 유화 붓질의 물질적 자취로서 만들어진 덩어리나 미끄러운 선들의 얽힘이 자아내는, 재개발에 의해 상실해가는 것들의 마지막 진동에 공명하며 이를 하나의 회화적 자취로서 자리매김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이제의 태도는 붓질 자체로 밤의 질감을 전하며 한층 더 추상화된 <최초의 밤>(2011), 모닥불의 흔들림과 온도가 담긴 <온기>(2014), 인물들의 동세가 배경과 하나되는 진동을 만들어낸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2017), 방랑자의 감정이 담긴 붓질을 통해 정박할 곳 없는 풍경의 광활한 인상을 전한 <들판>(2019)을 거쳐서 최근의 작업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러한 그림들에서 점차적으로 대상 자체를 붙잡기보다는 대상이 놓여있는 상황, 즉 대상을 둘러싼 공간에서 그가 감지한 분위기를 포착해냈다. 이러한 그림들의 소재가 된 것은 대부분 사회 안에 명확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기에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말하자면 지표 바깥의 대상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가능성의 영역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이제의 작업에서 언젠가부터 작가 주변의 젊은 여성들이 등장해온 것은 이 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은 연약한 대상들이 갖고 있는 미지의 힘에 대한 그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역동성을 잠재하고 있는 그 힘을 페미니즘 담론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불온한 향연의 인상을 전하는 색들과 붓질의 운동감으로서 표현해왔다.
에이라운지(A-Lounge)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서 이제는 모닥불 연작으로부터 이어진 최근작 <온기>(2023)와 함께, 앞서 언급한 <최초의 밤>으로부터 이어져서 밤의 분위기를 담아낸 <웅성이는 밤>(2022), 방랑의 여정을 떠올리게 하는 <국도>(2022), 지인 초상으로부터 이어지는 <군상연구>(2023) 등 그의 회화가 그간 모색해온 주제와 그리기 방식들을 한층 심화한 작업들을 전시한다. 특히 주목할 작품은 <디너>(2023)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오래 전 집들이 장면을 찍었던 사진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이번 전시에서 크기와 붓질이 다른 두 개의 버전이 함께 보여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이제가 2017년 이래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 연작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려왔던 여성 군상을 일상적인 실내 장면으로 구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에서 야외 풍경 속에 있는 여러 인물들의 움직임들이 군집을 이루며 배경과 동화된 하나의 리듬을 형성했다면, 최근작인 <디너>에서의 인물들은 식탁 위에 놓인 정물들을 중심으로 조용하게 자신들이 머무는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서로 공명하면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지점을 향해 온기를 만들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최근 작업은 인물과 정물과 풍경이 변별 없이 하나로 뒤섞인, 그가 실제로 감각한 공간적 상황에 가까운 그리기를 모색한 결과인 동시에,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 있는 미지의 가능성을 회화적 공간 안에서 형태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의 공간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작품인 <아직 약간의 빛>(2023)에서도 나타난다. 이불 속에서 반쯤만 얼굴을 내보이고 있는 여성의 시선과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모를 누군가의 손끝이 여성의 손과 이어지는 구도, 이불 위로 떨어진 옅은 빛줄기는 인물이 머문 자리에 남아있는 평온한 여운과 함께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대한 기대를 자아낸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으나 어디인지는 모를 지방도로를 그린 <국도>(2022)에서도 어둠을 가르는 헤드라이트를 통해 익숙한 세계 안에 아직 남아있는 미지의 가능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이제의 그림 속 대상들은 모두 아직은 모호한 채로 있으나 곧 모습을 드러낼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것들이 관계를 형성하면서 만들어내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개별적이었던 하나들이 모여 군집이 되고, 서로 다른 에너지들이 충돌하고 조화되면서 보이지 않는 웅성거림을 만들어간다. 미지의 힘이 잉태되고 있는 그 상태는 곧 그의 그림이 붓질과 색채와 물성을 통해 생성되는 상태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이 감각하고 있는 현실이 그림의 공간 안에서 이음새 없이 연동될 순간을 향해서, 그는 오늘도 어제와 다름 없이 매일의 일상이 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글 / 이은주 (독립기획자,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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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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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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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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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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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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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약간의 빛» installation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