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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hing.and.or.nothing

아.무.일.도

2018. 10. 2 - 31

장재민_아.무.일.도 인비테이션 이미지

점착력과 무력감의 관계
- 황윤중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몇몇 그림들에는 서로 다른 대상들을 한 몸처럼 달라붙게 만드는 점착력이 존재한다. 이 힘은 화면 속 배경과 형상, 풍경과 인물 사이에 그리고 화면 밖 감상자의 시선과 화면 사이에도 작용한다. 그리고 이 힘은 감상자에게 시각적 반응을 넘어선 몸의 촉각적 반응을 유도한다.

<Totem pole#3>(2018)의 경우 한눈에는 어디가 배경이고 무엇이 형상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고 화면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인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봐야 서서히 장승의 형상이 보호색의 평면에서 가까스로 드러난다. 여기서 배경과 형상은 서로 명확한 경계 없이 상호 작용하며 달라붙어 있다. 또한 <나뭇가지>(2018)에서도 물결을 배경으로 양손에 든 두 나뭇가지의 잎들이 얽히고설킨 화면의 중앙을 보면 물결의 유동성과 나뭇잎의 곡선이라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의 속성이 교환되는 관계를 맺는다.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에서도 풍경과 인물의 신체 사이에 점착력이 작용한다. <나무사람#1>(2018)에서 인물의 신체는 나무의 색과 질감에 동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뒤돌아서서 나무 기둥에 등을 맞대고 팔을 벌린 자세까지도 화면을 구성하는 수평과 수직의 배열을 충실히 따르면서 풍경과 거의 한 몸처럼 포개어지고 달라붙어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도 바위에 기대어 서 있는 인물의 몸은 바위에 맞댄 등과 어깨를 중심으로 자신의 경계선을 잃고 서서히 바위에 흡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바위사람>(2018)).

이처럼 그의 몇몇 그림들에서 배경과 형상, 풍경과 인물은 서로 점착되어 있다. 점착력에 의해 변형을 겪어 한눈에 쉽게 파악되지 않는 장면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다보도록 눈을 붙잡아두는 동시에 어느 순간 풍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 살을 맞대고 마찰시키고 싶게 만드는 촉각적 깊이감을 획득한다.

한편 풍경에 점착된 인물은 단지 풍경의 특성을 체화해 그곳의 감각을 전달하는 역할만을 수행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풍경의 형태와 색, 질감 등에 동화된 인물의 신체는 마치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보호색을 입고 풍경의 일부가 되어 숨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나무새벽>(2018)에서 이러한 인상은 더욱 짙어진다. 화면 상부를 뒤덮은 잎들로 얼굴이 가려진 채 나무 기둥들 사이를 걷고 있는 인물은 숨은 그림처럼 나무 사이에 위장되어 있다. 이제 의심은 확증에 가까워진다.

풍경은 하나의 은신처다. 자신의 얼굴을 지우고 익명의 상태로 숨어 있을 수 있는. 그런데 왜 인물들은 자신을 숨기려 하는가? 그의 그림이 풍경 속에 인물을 숨기는 이러한 태도는 분명 어떤 감정을 누설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은폐의 발견을 계기로 조심스레 화면에 담긴 정서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인물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묘사된 대상이 처한 상황과, 제시된 장면에 나타난 시간과 공간의 특성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감정을 누설한다.

땅 깊숙이 점착되어 있었을 뿌리가 땅 위로 들려 물가 위로 쓰러져 있는 나무의 모습은 더 이상 생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물가 나무>(2018)). 화면의 상단을 장막처럼 메우고 있는 나뭇잎들은 시선의 분산을 차단하는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흐름을 따라 시선을 밑으로 떨어트리며 흙 위로 빠져나온 뿌리를 거듭 바라보도록 부추긴다. 뿌리에서 기둥으로, 기둥에서 잎으로, 다시 잎에서 뿌리로 시선이 향하도록 동선을 제어하는 화면 구성은 결국 더 이상 양분을 취할 수 없는 한 신체의 무력함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이번엔 <길의 끝>(2018)을 보자. 눈앞의 장면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는 노을에 붉게 물든 암벽으로 가로막힌 길 끝에 서 있다. 결코 넘을 수 없을 만큼 경사가 가파른 암벽은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화면의 위로도 옆으로도 빈틈 없이 가득 차 몸의 전진이나 우회 만이 아니라 시선의 투과나 전진마저 완전히 차단하고 가로막는다. 이렇게 암벽은 하나의 거대한 장벽으로 기능하며 가로막힘의 감각을 극대화하고 증폭시킨다. 게다가 곧 해가 떨어지면 노을에 물든 산을 바라보는 자는 어둠 속에 갇힐 것이다. 이 장면은 붉은 빛을 통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감각까지 더하여 무력감을 공간화할 뿐 아니라 시간화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막다른 ‘길의 끝’일 뿐 아니라 볕이 남아있는 ‘시간의 끝’이기도 하다.

다시 인물이 등장하는 풍경으로 돌아온다. 무력감이라는 정서와 점착력이라는 형식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점착력은 무력감에 휩싸인 인물의 무력한 신체가 풍경과 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무력한 신체는 자신의 개별성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저항력이 없다. 장재민은 그런 저항력을 상실한 지극히 수동적인 신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풍경의 몸에 흡수되고 달라붙어 숨는 방식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풍경 속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둘 사이의 점착력은 모종의 무력감에 휩싸인 신체의 감각을 극대화해 표현하기에 적절한 형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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