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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e

2023.1.13 -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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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에서 본질로, 깊은 내면 속 풍경

몇 년 전 최윤희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적이 있다. 2019년 OCI미술관 전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작가가 귀가할 때 접했던 도시 외곽의 다양한 풍경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은 강렬한 색감과 호쾌한 붓의 스트로크와 함께 꽤 인상 깊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작업은 작가 주변의 실재하는 풍경을 이른바 추상적으로 ‘호방하게’ 풀어냈는데, 작가의 시각으로 포착한 감각의 체험이 화면 속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 작업들은 인터넷 웹브라우저의 ‘즐겨찾기’에 등록하듯이, 개인적으로 ‘관심 작가’ 리스트에 올리고 최윤희 작가의 작업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2021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을 찾았다. 과거의 작업들과는 다른 흐름을 보여주어 흥미로웠는데, 올해 1월 13일부터 2월 4일까지 에이라운지에서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은 변화된 작업 방식을 좀더 밀고 나아간다. “요즘의 작업들은 나의 감정 깊숙한 곳을 향해 서 있다. 나를 이루고 있던 오래되어 묵은 감정들에 집중한 시간들이다. 시간이 흘러 잊혀진 감정의 부분들은 불현듯 어느 날 다시 떠오른다. 무겁거나 슬픈, 상처가 되었던 감정들은 더 이상 상처의 흔적 조차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체의 어느 곳엔가 존재해 왔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그 자리들을 더듬거리며 찾아본다.” 작가는 최근의 작업 노트에 이렇게 썼다. 과거 작가의 작업이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적 재현이라면,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은 작가의 내면을 향한다.

사실 우리 모두 삶의 시간에서 각인된 기억, 감정 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작가의 말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내면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오래된 감정은 불현듯 신경을 뚫고 우리의 머릿속을 휘젓는다. 과거 작가가 묘사한 도시 주변의 잔상이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의 잔상으로 향하게 했다. 도시와 삶, 풍경의 잔상과 내면의 잔상이 접점을 이룬 것이다. 주제의 변화와 함께 작업 방법론에서도 변화를 보여 준다. 과거의 강한 붓터치는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인 색과 선, 면의 조합으로 진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신체성 강화에 기인한다. 작가는 캔버스의 물감을 손으로 문지르는 과정을 거친다. 색과 도상이 화면 안으로 흡수되는, 일종의 체화된 화면이다. 작가는 화면을 손으로 문지르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통해 일종의 구도(求道) 행위처럼, 과거의 시간에 대한 감정,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해소한다.

<다시 들어가기>, <조용한 말들> 시리즈, <Silent noise> 시리즈, <Blow> 시리즈, <유일한 통로>, <가만히 서서#1> 등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이렇게 신체성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물론 작업의 큰 줄기가 바뀌고, 작가의 작업 방법론이 바뀌었다고 해도, 도출되는 화면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아마 이 ‘변화/변화없음’의 접점이 작가 최윤희를 드러내는 일종의 정체성이라고 할 게다. 사루비아에서의 전시가 흰색 계열의 추상으로 최근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면,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은 좀더 다양한 색이 화면을 뒤덮는다. 과거 추상 풍경화에서 보였던 색상의 톤이 이번 작업에서 연속성을 띈다. 작가가 느꼈던 감정의 실체라 할 수 있는 붉은 색, 푸른 색 등 부드럽지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양한 색감은 신체성의 과정을 통해 더욱 묵직해진다. 화면을 손으로 문지르는 행위 외에 작가는 이른바 신체 속 신경처럼, 혹은 감정의 실타래 같은 선과 감정의 레이어를 하얀 장막으로 표현한다. 화면 옆에 숨어있는 나열된 단어 또한 작가의 감정을 살펴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Mute’다. ‘mute’는 사전적 의미로 “무언의, 말없는”, “소리를 줄이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네이버 영어사전). 일반적으로 우리는 TV나 음악 플레이어의 버튼에서 ‘mute’를 접하게 된다. ‘pause’가 영상이나 음악 재생 자체를 잠시 멈추는 것이라면, ‘mute’는 재생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소리만 들리지 않도록 할 때 사용을 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을 볼 때, 전시 제목 ‘mute’가 드러내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고 삶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기억과 내면의 풍경이 드러내는 다양한 소리들을 잠시 꺼두고 살펴본 결과물이 아닐까(‘pause’는 결국 삶의 중단이 될 테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작업을 볼 때, 최윤희의 작업은 외부 세계에서 내면 세계로 나아간다. 이는 객관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포착하는 모더니즘의 세계에서 주관적이고 불분명한 내면의 세계를 순간순간 추적해나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로 변화함을 의미한다. 작가의 성장, 성숙함의 결과다. 결국 동시대는 현상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시대다. 작가는 시간 속 기억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그 속의 풍경이 드러내는 세계는 정답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때그때 생겨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불확실의 세계다. 작가는 이에 대해 묵묵히 자신의 신체성을 통해 체화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더듬거리고 느끼고 발견한다. ‘mute’로 소거된 소리, 혹은 세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또다른 풍경으로 복귀되고 새로운 세계로 재구성된다. 관객들은 최윤희 작가의 작업이 일종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된다. 작가의 작업을 통해 관객들은 자신의 내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것은,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 속에서 존재하면서 기억하고 망각하고, 이를 해소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우리는 갈망한다. 최윤희 작업을 통해 느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이번 전시의 미덕이 아닐까.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내면으로 들어가보자. 부드러운 화면의 선과 색의 풍경 속에서 일상 속 삶의 소음을 잠시 끌 수 있을 것이다.

찰칵…. “mute.”

글 / 류동현 에이라운지 객원 큐레이터,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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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e»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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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 <Silent Noise#2>, 2022, oil on canvas, 181 x 18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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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e»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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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e»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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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e» installation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