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Flashforward

2024. 04. 09 - 04. 27

Invitation_Homepage_Final

끝없이 확장하는 ‘열린 서사’, 그 내면의 풍경

작품을 가만히 바라본다. 흡사 북반구 하늘의 오로라처럼, 오묘한 색상들의 흐름이 화면을 메운다. 황선영의 2023년 추상화인 <플래시포워드>다. 세로 183센티미터, 가로 153센티미터 크기의 작품은 거대한 빛 줄기가 쏟아지듯, 색과 선이 화면 가득히 출렁인다. 작품 앞에서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는 행위는 회화를 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작가의 작품 앞에서는 특히나 이 행위가 빛을 발한다. 처음 직관적으로 와 닿는 요소는 색과 붓질의 ‘면’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작가의 심리, 상황을 추적하는 단서를 얻는다.

20세기 초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창시한 큐비즘은 추상미술의 단초를 만들었다. 이후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업과 몇 권의 저서를 통해 추상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논의했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21세기 현재는 어떤가? 가장 새로운 예술을 앞세워 단선적 흐름을 드러냈던 모더니즘 예술 시대 이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는 구상과 추상이 혼재하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되도록 만들었다. 황선영 작업 또한 이 맥락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이라운지에서 4월 9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플래시포워드> 전시는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황선영이 보여주는 ‘지금, 여기’ 추상화의 현장이다. 런던 슬래이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런던에 체류하면서 활발한 작업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가 5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이다.

작가의 작업을 처음 보면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는, 붓질이 만들어내는 선과 면, 그리고 다양한 색이 화면을 채우는 추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보여주는 화면의 직조 방식은 추상화의 전통성을 넘어서는 새로움을 드러낸다.

먼저 눈에 띠는 점은 작품의 제목이다. 형식주의적, 혹은 개인 내면을 표출하는 동시대 추상회화에서 주로 보이는 ‘무제’가 아닌, 서술적 내용의 제목으로 제시된다. <플래시포워드(Flashforward)>(2023), ‘회복력, 탄성’이라는 의미의 <리질런스(Resilience)>(2023),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로즈 밸리의 튀르키예어인 <귈리데레 바디시Güllüdere Vadisi>(2023).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2023), <타임 존(Time Zones)>(2023), <참깨(Sesame)>(2023), <예상되는 절정의 순간에(At the Expected Climactic Moment)>(2023), <크레이지 드림(Crazy Dream)>(2022), ‘순식간의’라는 의미의 <플리팅(Fleeting)>(2021), <해초(Seaweed)>(2021), <로타 아파트에서 본 두브로브니크 풍경(View of Dubrovnik from Apartment Lotta)>(2018) 등은 작가 개인의 꿈, 경험, 여행, 혹은 작가가 접한 사물이나 상황, 장소 등이 작업의 발화, 동인으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제목을 떠올리고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끝마치고 오랜 시간 화면을 보면서 제목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가 작업 과정 속에서 여러 요인들을 계속 곱씹어서 은유적으로 내면화시킨 비가시적 흔적들을 발굴, 되새기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에 대해 감정적 고고학(emotional archaeology)’이라고 명명한다.

이는 화면을 구성하는 작업 방식에도 적용된다. 작가는 스케치나 드로잉과 같은 작업의 예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발굴하고 되새긴 내면의 흔적들을 곧바로 화폭으로 옮긴다. 이러한 즉흥적 붓질을 수십 번의 레이어로 쌓아간다. 과정과 결과가 레이어가 쌓이면서 혼재된다. 물감을 두터이 쌓아가는 방식이 아닌, 맨 아래의 색부터 지우고 혼합해 가면서 얇게 펼치며 쌓아가는 작가의 작업은 원색이 주는 강렬함과는 다른 부드럽고 온화한 색의 혼합으로 드러난다. 우연과 의도를 거쳐 대상이 색과 선, 면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가 드러내는 화면의 깊이감, 색의 조화, 다양함은 우리가 동시대 미술 작품을 보는 데 있어 한동안 등한시 했던, ‘보는 즐거움’을 준다. 여기에 덧붙여 ‘제목의 구체성’은 화면을 본 관람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물론 혼돈스러움도 함께).

처음에 이야기한 작품 바라보기로 돌아가 작가가 드러내는 색과 붓질의 형태에 주목해 보자. 작가의 화면에는 작가만의 현실과 내면이 만들어낸 양가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보링거가 이야기한 감정이입충동이나 추상충동1), 칸딘스키가 보여준 ‘인상’, ‘즉흥’, ‘구성’ 등 세분화했던 작업 방식을2) 넘어선 총제적인 결합과 구성으로 완결되어 있다. 이는 추상이라는 장르가 시대를 거듭하면서 작가와 담론이 더욱 결속되고 정밀하게 조율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또한 작업 속 요소들의 혼재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플래시포워드’는 사전적 의미로 이야기 장면을 잇는 기법 중 하나로 문학, 영화에서 사용된다.3) 플래시백이 과거를 회상할 때 사용된다면, 플래시포워드는 이야기 도중 미래를 보여주고 그 미래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 지 보여준다. 황선영의 작업은 수많은 색과 붓질의 레이어가 쌓이고 지워지는데, 순서가 뒤섞인 레이어의 결과물이 결국 미래와 과거를 오고 가면서 완성됨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이렇게 작가가 보여주는 추상의 화면은 ‘열린 서사’ 속 내면의 풍경이다. 가수 윤하의 노래, ‘사건의 지평선’이 우리가 ‘목도(혹은 파악)’할 수 있는 세계의 끝이라면(관계에 대한 노래지만, 천문학 용어이기도 하다), ‘플래시포워드’로 명명된 이번 황선영의 작업은 미래와 과거, 예측과 발굴 등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끝없이 확장한다. 하나의 풍경과 단어, 그 기억으로 촉발된 사건이 만들어 낸 ‘열린 서사’는 현실의 ‘어떤 것’에서 작가의 심상과 사유의 여과지를 거친 후 화면의 선과 색으로 채워진다. 여기에는 몸과 정신, 현실과 상상, 외면과 내면, 구체적인 것과 비구체적인 것, 빛과 어둠, 가시적인 것과 비 가시적인 것, 존재와 부재, 영속성과 일시성, 혼란과 통제, 우연과 의도 등이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화면은 프레임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보는 이의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끝없는 세계로 말이다.

----------------------------------------
1) 빌헬름 보링거 지음, 『추상과 감정이입』, 권원순 옮김(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82).
2) 하요 뒤히팅 지음, 『바실리 칸딘스키』, 김보라 옮김(서울: 마로니에북스/타셴, 2007).
3) 위키백과 ‘플래시포워드’ 항목.

글/류동현 (미술비평)

DSC00279

«Flashforward» installation view

DSC00241

«Flashforward» installation view

DSC00301

«Flashforward» installation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