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Waiting Room

2022. 5. 18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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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와 영겁, 삶과 죽음, 그 멜랑콜리함에 대하여

류동현 에이라운지 객원 큐레이터, 미술비평

저 멀리 거인이 다가오고 있다. 숲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호수의 한 켠이다. 다가 오는 거인은 언덕을 지나 벌써 한 발을 물 속에 담갔다. 호수의 물을 가로질러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거인은 티탄족 중 시간의 신 크노소스다. 시간의 신이 자신을 끝내리라는 것도 모른 채 화면 앞에 있는 한 사람은 땅에 걸터누워 잠을 자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물 속에 있는 죽은 사슴을 꺼내고자 몸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시간의 영속성 속에서 삶의 유한함을 우화적으로 보여주는 류노아의 <Youth>는 작가가 최근 천착하는 시간과 삶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에이라운지에서 5월 18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류노아의 《Waiting Room》 전시는 2013년 개인전을 연 이후 10여 년 만에 국내에서 선보이는 개인전이라는 데 그 의미가 크다. 2015년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까지 2011년 고양창작스튜디오, 2012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작가로 선정되는 등 국내에서 주목받는 ‘영 아티스트’였던 작가는 지난 해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화풍으로, 좀더 연륜이 쌓인 원숙해진 작업의 결과물을 선보인다.

류노아는 2015년 네덜란드의 라익스아카데미 레지던시에 선정된 것을 계기로 한국을 떠났다. 이후 2017년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라이프치히 화파의 본거지인 독일로 거주지를 옮겨 베를린에서 묵묵히 작업에 매진했다. 독일로 거주지를 옮긴지 몇 년 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한동안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더 나아가 영원한 시간 속 유한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작가를 휩쌌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으면서 작가는 이에 대한 고민을 새로운 작업 속에 투영하였다. 동양화를 전공한 류노아는 초기 채색한국화에서 유화로 미디엄을 바꾸면서 네오 라우흐로 대표되는 라이프치히 화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018년에는 라이프치히 국제예술프로그램 레지던시에 선정되면서 직접 라이프치히 화파의 본거지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곳에서 작업을 하면서 좀더 자신만의 화풍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독일과 국내에서 제작한 유화 10여 점과 2018년 제작한 연필 드로잉을 출품했다. 전시에 출품한 류노아 작업의 화면에는 작가가 천착한 영원한 시간과 유한한 삶에 대한 생각들이 다양한 이미지들의 레이어들로 중첩돼있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Waiting Room>(2020)은 하늘이 보이는 고대 로마 시대 빌라의 중정을 배경으로 한다. 흡사 화산에 뒤덮임으로써 영원성을 획득한 폼페이의 빌라 같기도 하다. 중정에는 화초가 자라는 화단이 있고 여기에 세 명의 사람이 앉아있다.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과거의 빌라이지만, 중정 곳곳에는 노란 색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시대를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벽면에는 에로틱한 포즈의 ‘사춘기 소녀’ 그림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발튀스의 소녀 그림이 젊음을 대표한다. 창 밖 멀리 청동상이 서있다. 늙어가는 육신의 유한함은 이러한 도상들을 통해 더욱 대비된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배경으로 희미하고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일요일>(2021)은 여유로운 일요일의 어느 요양원 휴게실 풍경을 보여준다. 창을 통해 따뜻한 빛이 들어오는 휴게실의 한 켠 의자에는 노인이 책을 읽고 있다. 화면 앞 아치형의 통로의 벽에는 안티키테라 섬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동상 얼굴이 그려져 있다. 기원전 340년 경에 제작된 이 작품의 제목은 <젊음>이다. ‘젊음’을 통과해 노년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을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드러낸다.

백조를 소재로 그린 <1907>(2022)은 기묘하다. 왜 ‘1907’일까. 화면에는 한가로이 백조들이 연못 위를 떠다니고, 한 마리의 백조는 화면 앞쪽으로 나와 먹이를 찾는 듯 목을 구부린 채 땅을 유심히 보고 있다. 갑자기 1907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사실 미술사에서 1907년은 기념비적인 해이다. 바로 르네상스 이후 이성의 세계를 대표했던 일점 소실, 원근법을 파괴한 작품이 등장한 해가 아닌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하나의 시점을 없앤 다시점을 통해 입체파라는 조류를 만들어내면서 조화로운 고전적인 도상의 이미지들은 이제 동시대 미술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앞서 나갔는지 모르지만, 이 또한 시간의 문제로 읽히게 된다. 백조는 일부일처제와 충성심으로 불멸의 사랑을 상징한다. 이 평화로운 백조가 있는 풍경은 혼돈과 열기와 광기의 현대 시대 이전의 영원성을 상기시키는 매개체가 아닐까.

현대사회에서 폭발적인 힘과 영향력을 드러내는 인터넷을 소재로 제작한 연필 드로잉 시리즈도 흥미롭다. 작가는 인터넷 창을 상징하는 다양한 지질의 종이로 중첩한 종이에 클래식한 도상을 차용해 동시대 인터넷의 여러 현상들을 ‘지식의 나무’, ‘선지자’, ‘십자가’ 등의 종교적 속성으로 묘사한다.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분석했던 카를 융은 시간과 개인을 초월하는 추상적인 영혼의 형상을 원형(Archetype)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능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도 실은 무의식적으로 원형이 작용한 것이다. 류노아가 생각하는 영원한 시간이나 유한한 인간이라는 인식 또한 보편적 인간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본능의 한 축이다. 이를 구체화한 것이 상징이며 신화 전설, 예술 또한 원형이 이미지나 이야기의 형태로 구체화된다고 융은 이야기한다. 류노아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고민한 인간의 보편적 문제, 시간과 삶의 문제를 고전적인 도상이나 신화, 종교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화 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류노아의 화면은 흡사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벽화 같다. 과거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처럼, 혹은 피뷔 드 샤반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느낌의 화면, 고전적인 도상은 시간의 흐름 속 조화와 영원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메타포다. 2021년 제작한 <실낙원>은 성경 속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무에 똬리를 틀고 유혹하는 뱀의 얼굴은 과거 벽화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빠진 듯, 화면 자체에서 시간성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를 한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작가는 작업의 시간성을 드러내지만, 아담 이브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재생의 의미 또한 화면 주변의 풍경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류노아 작품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아니 우수가 느껴진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예술적 한계에 고통 받고 있는 예술가의 우수(멜랑콜리)를 드러냈다면, 류노아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이 감정을 더욱 확장시킨다. 작품 속 인물들은 유한한 삶의 한계를 드러내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멜랑콜리를 드러낸다. 이와 대비되어 영원함을 대변하는 무표정한 고전적 도상은 시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유한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러한 멜랑콜리 속에서 류노아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이러한 감상을 통해 인간의 한계만을 드러내는 것일까. 사실은 영겁과 찰나, 삶과 죽음, 영원함과 유한함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현실의 삶에 대한 의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있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작가의 삼부작 회화, <금 쟁반>(2020), <금 화병>(2020), <금 열쇠>(2020)에서 그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작업들은 흡사 교회 제단의 삼면화처럼 세 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으로 된 이들 오브제를 쥐고 잠을 자고 인물들은 능력, 희망, 꿈을 가지고 고단한 현실의 삶을 ‘존버’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알레고리에 다름 아니다.

바니타스가 허영을 통해 삶의 겸손함을 가르쳤듯이, 류노아의 작업은 시간의 신이나 박제화된 고전기 도상들 등, 시간의 영원함을 느끼는 대상을 통해 짧은 삶의 의미를 극대화 시킨다. 영원이 있기에 찰나를 느끼고 유한한 삶이 있기에 삶은 더 소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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